서울시가 주최하는 사상 첫 실버취업박람회가 지난달 29, 3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펼쳐졌다. 모두 271개 업체가 참가해 3,500여명에게 일자리를 나눠준 행사는 '노인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우리사회 실버취업문제의 심각성을 한 눈에 엿보게 한 자리였다. 노인들은 한결같이 직장생활에서 얻은 귀한 경험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했지만 막상 나온 일자리들은 소위 3D업종이 대부분이었다. 한 노인은 "여성부처럼 실버부라도 생겨야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자조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박람회 첫 날 현장에서 만난 오동환(72)씨의 이력서에는 사진이 부착되지 않았다. 대신 사진을 붙이는 칸에는 '명일 30일 와서 사진 붙이겠음'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사진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현장에서는 무료로 즉석 사진촬영 및 현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오씨는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목에 양성종양이 생겨서 얼마전 수술했어요. 내일이면 이 실밥을 풀으니까 그때 사진찍어서 내려고 해. 좋은 인상을 줘야 취직도 잘 될 텐데 목에 꿰맨 자국 보이는 채로 사진찍으면 안 좋잖아."
오씨는 이날 모두 10개 업체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이력서에는 '급여가 없어도 일하고 싶으니 특별심사 부탁드립니다'는 글귀를 써넣었다. 희망근무지역도 1순위는 서울이라고 썼지만 2순위에는 지방도 무관하다고 적었다. 그만큼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최근 4년간 중국 심천에 있는 완구회사에 다니다 지난해 8월 회사를 그만두고 귀국해서 한 10개월 쉬었는데 노니까 병나더라구요. 월급 많고 적은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가정이나 회사나 사회에 뭔가 도움이 되는, 가치있는 존재여야 하는데 일이 없으면 그게 안돼. 또 일을 해야 건강도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오씨는 일제치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닌데다 군산상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일어 영어 통·번역에는 자신있고 중국어도 잘해 번역이나 간단한 회화가 필요한 직종에 이력서를 냈다. 행사는 구직자가 이력서를 내면 구인업체 직원과 즉석 면접을 하고 추후 채용여부를 통보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날 오씨가 이력서를 낸 곳에서는 어디도 면접을 하지 않은채 서류만 접수했다.
"이렇게나마 구직활동을 할 수 있으니 참 좋은 행사이긴 한데 업체에서 나온 직원들이 좀 책임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겉치레로 대응하는 데가 많아…. 뭐, 그래도 해봐야지요."
오토바이 헬멧을 쓴 채 나온 김성웅(57)씨는 다니던 버스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벌써 5개월째 실업급여로 생활하고 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취직해야 하지만 요즘은 버스운전사로 취직하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버스운전은 3D업종인데 요즘 거기도 자리가 없어요. 취업 원하지만 요즘은 젊은사람도 많이 들어오니까 자연 나이든 사람은 밀려나요. 오늘 와보니까 우량한 버스회사는 안 들어와있고 사정 안좋은 회사만 들어와 있는데 나이든 사람은 싼 값에 쓸 수 있으니까 경비절감 차원에서 그렇겠지. 일단 시도를 해보는데 잘 될 지 모르겠네요."
이날 하루 모두 세 곳에 원서를 접수시켰다는 김씨는 "그래도 이 회사 저 회사 찾아 다니는 것보다 이렇게 한 자리에서 이런저런 구직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가정주부 이경숙(59, 가명)씨는 남편이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같이 사는 미혼의 아들에게 전적으로 생활비를 의존하는 것이 미안해 일을 찾는 경우다. 그러나 막상 구직을 위해 와보니 사무나 상담직 등 원하는 직종은 거의 없고 아기 돌보기나 파출부 등 육체노동직이 대부분이라 실망했다고 말한다.
"노인들은 노동력은 없지만 앉아서 머리 쓰는 것은 할 수 있는데 와보니까 여자노인용 일은 거의가 육체노동직이고 직종이 너무 한정돼 있어요. 간혹 숲 해설가 등 전문직이 있는데 그건 먼저 몇만원을 내고 교육을 받아야 돼. 괜히 취직시켜 준답시고 장사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더라구."
이번 행사에는 이틀간 줄잡아 3만여명이 다녀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 구직자와 구인업체를 직접 연결시켜주는 뜻깊은 행사였지만 참가업종이 단순노무직에 치중된데다 몇몇 업체들은 구인과 상관없이 노인들을 대상으로 자사제품 홍보에 열을 올리거나 대리점주를 모집한다며 퇴직자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행태를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했다.
행사를 주관한 서울시 고령자취업알선센터 박준기 부장은 "우리나라 60세 이상 노인의 52.4%가 생계유지를 위해 직업을 원하지만 사회적으로 노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분위기가 성숙돼 있지 못한 게 현실"이라면서 "이번 행사가 톨게이트 직원이나 도시가스검침원 등 고령자적합직종에 노인채용비율을 강제하는 식으로라도 정부가 실버취업에 적극 나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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