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문산에서 파주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1번 국도와 연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잇는 3번 국도는 철책선에서 서울로 접근하는 최단거리 코스다. 한국군과 미군은 이 도로를 수도방어 작전의 양 축으로 삼는다. 56번 지방도는 두 축을 가로로 잇는 이동로다. 지방도 변에는 미군부대와 한국군 부대가 군데군데 주둔해 있다. 농사꾼이 웅크린 논밭이 펼쳐져 있고, '용주골'이라 불리는 사창가도 있다. 그리고 3번 국도와 만나는 언저리에서 경기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앞을 지난다. 작년 6월13일, 이 마을 살던 열 네 살 동갑내기 여중생 심미선과 신효순은 마을 사람들이 서낭당 고개라 부르는 곳에서 이 도로를 달리던 미군 부교탑재 궤도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 친구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월드컵 포르투갈전이 열리기 하루 전, 지방 선거 공휴일이었다."1년이면 어떻게 든 매듭될 줄 알았는데…."
소녀들이 살던 마을은 오래 전부터 바퀴 달린 탈 것과 관련이 많았다. 양주목과 파주로 가려는 마차 따위가 재를 넘기 위해 모여 드는 주막거리가 있었고, 그래서 마을 이름도 거마(車馬)울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 주막거리엔 미군 부대에 이어 한국군 부대가 들어섰고 마차 대신 탱크가 고개를 넘었다.
40가구 남짓한 마을은 작년 이맘때 그랬던 것처럼 농번기를 맞고 있었다. 미선이의 집은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에 있다. 붉은 벽돌에 주황색 기와를 올린 단층 집은 아버지 심수보(50)씨가 미선이가 나던 해 직접 설계해 지어올렸다. 심씨는 효순이 아버지 신현수(50)씨와 함께 농한기면 목수일로 풍족할 리 없는 다랑논 소출을 벌충해왔다.
미선이 할머니(69)가 여름볕 아래서 텃밭의 잡초를 솎고 있었다. 미선이가 좋아했다는 토마토가 꼬챙이를 타고 오르며 하얀꽃을 피워놓았다. 할머니는 "그날도 그랬다"고 했다. "토마토 줄기를 묶다 보니 길에 차들이 꽉 차서 꼼짝 안 해. 이장이 와서 집에 손녀가 있는지 확인해보라는 거야……."
해가 이울 즈음 검게 그을린 부모들이 논에서 돌아왔다. "요즘 한참 바쁠 때"라며 "기자들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보니 1년이 되긴 된 모양"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 보기 민망하다고 했다. "어른 돌아가셔도 49재로 끝인데 애들 일로 1주기를 한다고 법석대니…. 그래도 일하는 양반들(여중생 대책위) 고생하는 걸 뻔히 알면서 안 나갈 수도 없고."
미선이 아버지나 효순이 아버지는 적어도 사고 직후엔 시민단체 사람들과 상종조차 않으려 했다. "관(官)에서 다 알아서 해줄 일을 괜히 시끄럽게 만들 것이 두려워서" 였다. 밭을 갈다 캐터필러 소리가 울리면 허리 펴고 물끄러미 한번 쳐다보고 다시 밭을 갈던, 마을 옆으로 미군 탱크가 지나가는 것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온 농사꾼들이었다. 그런 두 아버지는 1년 새 많이 '의식화'됐고, 미선이 아버지는 "어찌 보면 그게 관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 눈치만 보고 아무 소리도 못하고, 정치인들은 선거 때가 되니까 말만 번지르르 하게 하고… 대통령도 미국 가서 적어도 의사표시는 해 줄줄 알았는데 아쉽더라고. 1년 동안 여러 사람들이 고생했는데도 소파(SOFA)개정이 제대로 안 되는 게 다 정부의 성의 부족 때문인 것 같고, 이런 것 저런 것 보다 보니까 나라가 이 정도 민주화된 게 다 운동하는 사람들 덕이라는 생각도 들고…." 1년간 가슴에 쌓아 놓은 말들이 많아 보였다.
미선이 어머니 이옥자(49)씨는 "논에서 일하는데 파란 풀들 사이로 미선이가 다니던 조양중학교 체크무늬 교복 치마가 살랑살랑 걸어 오는 게 보여 딸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또 울었다. "애들도 피곤할 것 같아요. 1년이면 이제 편히 쉬어야 할 텐데. 자꾸 거론되면 영혼도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1년이면 어떻게 든 매듭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효순이가 살던 곳은 200년은 족히 된 듯한 느티나무 아래 슬레이트 지붕 집이다. 4대째 내려오던 집을 수리만 해가며 살다 보니 곧 허물어질 듯 위태위태 하다. 효순이 아버지 신현수씨는 "배상금 받아 집 고쳤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그냥 살 요량"이라고 했다. 법무부로부터 나온 1억9,000만원의 배상금을 놓고선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는 두 아버지다.
신씨는 "사고현장 바로 앞에다 추모비를 세워올린 것이 요즘 들어 자꾸 후회가 된다"고 했다. "오다 가다 그것만 보면 또 생각이 나니…. 평생 그럴 것을 생각하니 추모비를 괜히 세운 것 같고…."
월드컵 1주년 기념 방송이 대낮에도 TV를 탔다. 효순이 어머니는 말없이 채널을 돌려버린다. 딸의 죽음이 실감난 사고 다음 날, 어머니는 세상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는데 세상은 온통 함성과 기쁨의 도가니였다. 한국축구가 월드컵 16강 진출을 확정 지은 날이었다. 그날 이후 효순이 어머니에게 '월드컵'은 그날을 되돌려놓는 주문이 됐다. 효순이 어머니가 없는 반찬이나마 대충 먹자며 텃밭에서 따온 푸성귀를 담은 점심을 내온다. "그래도 산사람은 먹고 자고 그래요." 어머니의 말이 서글프다.
사고현장 주변 투기꾼까지 꼬이고
마을에서 200여m 떨어진 사고 현장 앞 추모비엔 다녀간 이들의 흔적이 종이학이며 말라버린 흰국화로 남아 있었다. 미2사단은 작년9월 장병일동 명의로 두 소녀가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다"며 영어와 한글로 추모 문구를 새겨 비를 세웠다. 그 후 사고를 낸 미군 병사들은 무죄 평결을 받았고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갔다. 미군들은 두 소녀의 죽음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깨달았을지 몰라도 이 곳 사람들은 한미관계가 평평하지 않음을 처연히 깨달았을 터였다. 누군가가 추모비에 새겨진 '미2사단 장병 일동' 문구에다 허옇게 스프레이를 덧칠해 놓았다.
추모비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고급 승용차 한대가 길가에 멈춰섰다. 차에서 내린 40∼50대 남자 세 명이서 한참 이 곳 저 곳을 가리키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선 이내 자리를 떴다.
나중에 마을 사람들에게서 확인한 내용은 최근 들어 부동산 업자들의 발길이 잦아졌다는 것이다. 사고가 난 도로변엔 인도를 내는 공사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고, 4차선 확장 공사도 곧 시작된다는 얘기도 많았다.
"한참 후순위 였던 56번 지방도 확장공사가 작년 사고 때문에 당겨져 곧 이뤄질 모양"이라는 게 마을 사람들 얘기였다. 먹고 사는데 익숙한 투기꾼들이 이걸 놓칠 리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1년 동안 참 일도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고 했다. 조용하던 마을에 시민단체 사람들이며 대학생이 숱하게 다녀갔다. 서울에서 광화문을 뒤덮은 촛불시위가 있었고 정치인들과 대통령 후보도 다녀갔다.
"이라크 전쟁을 봐. 미국이 어디 보통 나라야. 대통령도 오죽하면 미국 가서 그랬겠어. 해도 되지도 않는 일을 자꾸 들먹이면 부모들 마음만 아프지." 미군들의 무죄평결 직후엔 '소파를 개정하라'는 플래카드도 마을에다 내걸고 추모집회도 열고 했던 마을 사람들이다. "믿었던 대통령이 그러는 것을 보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임을 깨달았다"고도 했다.
56번 지방도가 지나는 농촌 마을은 지난 한해 역사가 격변하는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였다. 마을 앞 도로 위에서 벌어진 사고 위에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해석이 덧씌워졌다. 그리고 굽이치는 도로만큼이나 주민들의 심사도 1년간 굽이쳤을 터였다.
마을 이장 박용안씨는 "사고 이후에는 미군들이 마을 앞을 지나치기 전에 꼭 알려 오더만. 그런데 요즘엔 훈련 철인데도 안보여. 아마 미군들이 다른 길로 돌아다니는 모양이야"라고 했다. 하지만 "곧 다시 지나겠지. 언제까지 피해 다니겠어"라고 말했다.
56번 지방도는 초여름 녹음을 끼고 구불구불 대며 소실점을 향해 아스라이 뻗어 있었다.
/양주=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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