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선정성은 방송사 간 치열한 생존경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공영방송 NHK와 5개 민영방송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일본 민방은 도쿄(東京) 본부를 중심으로 20∼30개 지역 방송국으로 구성돼 있는데, 니혼(日本) TV, TBS, 후지(富士) TV 등 3사의 콘텐츠 제작 능력과 경영 수완은 후발 주자인 아사히(朝日) TV, TV 도쿄(東京)에 비해 월등하다. 최근 아사히 TV 여자 아나운서의 불륜을 둘러싼 일련의 소동은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방송 상업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건의 발단은 갓 결혼한 여자 아나운서 도쿠나가 유미(德永有美·28)가 불륜으로 이혼 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잡지의 보도였다. 불륜 상대는 그가 진행하는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한 인기 개그맨 우치무라 데루요시(內村光良·38). 불륜이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방송가에서 불륜은 심심찮게 있어 온 일로 그리 대단한 화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사건을 처리하는 아사히 TV의 태도였다.
아사히 TV는 도쿠나가 아나운서에게 TV를 통해 공개 사죄하도록 하고, 사전에 신문의 TV 프로그램 안내란에 이 사실이 대문짝만하게 실리도록 했다. 결국 도쿠나가 아나운서는 자신이 진행하는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 '슈퍼 모닝'에서 연신 눈물을 흘리며 불륜 사실을 고백하고 사죄한 뒤 "오늘을 끝으로 방송을 그만두겠다"고 밝혔다. 아사히 TV측은 "'슈퍼 모닝'의 주시청자인 주부들로부터 많은 항의를 받았다"고 공개 사과 배경을 들었지만 직원의 사생활을 시청률 경쟁에 악용했다는 비난이 방송사 안팎에 무성하다.
아사히 TV는 휴직 중인 아나운서에 대한 퇴사 조치까지 언급한 반면 '여자 아나운서 킬러'로 불리는 개그맨 우치무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세계적으로도 드물 만큼 많은 전국 네트워크가 경쟁하는 일본의 특수한 방송 구조와 방송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거대 연예기획사의 존재가 있다.
일본의 상거래 관행은 거래처가 되기는 힘들지만 한 번 거래를 트면 쉽게 거래처를 바꾸지 않는 게 특징이다. 연예계도 예외는 아니다. 후발 주자인 아사히 TV가 이런 관행을 극복하고 유명 개그맨이 포진한 거대 연예기획사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어렵게 잡은 연예기획사와의 관계와 시청률을 생각하면 문제의 개그맨을 쉽게 출연정지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 방송계의 여성인력은 전체 방송종사자의 10% 정도로, 꾸준히 늘고 있다. 하지만 여자 아나운서에게는 아직도 결혼하면 퇴사해야 하고, 30세 이상은 비인기 프로그램으로 밀려나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 대우는 접어두더라도 시청률을 위해 직원의 사생활까지 이용한 아사히 TV의 처사를 보면서 방송이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김경환·일본 조치대 대학원 신문방송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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