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철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고샅 길을 쏘다니던 동네 개들조차 혀를 빼물고 그늘만 찾아 들던 지난 달 28일, 30도 폭양의 한 낮. 강원 평창군 용평면 용전리의 한 허름한 막국수집.오페라는 커녕 스무 살 넘긴 뒤로 극장 근처조차 가 본 적이 없다는 안희양(50·오른쪽) 이장과 오페라를 운명으로 알고 살 법한 국내 굴지의 오페라단 단장 김기원(43·여·관동대 성악·왼쪽) 교수가 마주 앉았다. 이미 몇 차례 안면을 튼 듯, 국수 가락을 깨작대던 안 이장이 임의로이 말 문을 연다.
―교장 선상님(오페라학교), 오페라 그기 도대체 뭐 하는 거래요?
"(웃으며)여러 번 말씀 드렸잖아요? 노래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연극하는 거라고…. 마을 어르신들도 보시고, 아이들도 가르쳐 줄게요."
―(혼잣말로)촌 아∼들이 그런 거 배울라고 하나. 돈도 받아요?
"(정색하며)아∼뇨. 주민들은 100% 공짭니다."
―100원 한 장 내고도 볼 사람 없을 끼구마. 그게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요?
"무대도 전국노래자랑하고 다르고, 옷도 몸빼바지 입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마(벌써) 몇 번을 들어도 귀에 들어와야 말이지.
"그러게, 먼저 번 평창문예회관 공연 때 한번 와서 보시라니까요."
"농번기에 그거 보믄 하루 해가 가는데…." 안 이장의 넋두리는 마침 몰려 든 손님들의 소음에 덮였다.
이장만은 알고 있어야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지난 해 초, 환갑 진갑 다 넘긴 장평초등학교 용전분교가 폐교된 뒤 김 교수가 그 학교를 '세계 최초' 오페라 체험학교 겸 상설 야외공연장으로 활용하겠다고 나서면서부터 비롯됐다. 120가구 388명의 용전리 주민들은 처음엔 "이게 뭔 소린가" 했고, 내달 말 첫 오페라 축제가 예정된 지금은 "죽은 학교 살리고, 마을도 발전시켜준다니까…"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뭔가 찜찜함이 없지는 않다. 도대체 오페라가 뭔 지 모르겠고, 조용필이도 없는 데 수 천명이 구경을 온다는 게 믿기지도 않는 것이다. 이른바 문화충격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장의 '오페라'에 대한 집요불굴의 질문과 끝까지 웃는 낯을 풀지 않는 김 교수의 끈기도, 용정리가 겪을 그 상상불허의 충격을 조금씩 조금씩 흡수하는 과정인 듯 했다.
마을 운영의 책임자인 이장의 오페라에 대한 집착은 '알아야 이장' 수준이 아니라, '이장이라도 알아야'에 가깝다. 그가 교수에게 던졌던 질문들을 하루에도 열 두 번 주민들에게서 듣고 있고, 또 답변해야 할 책임을 진 게 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장은 이웃 마을은 물론, 장평군내 8개 읍면을 상대하는 홍보사절이기도 하다.
오페라? 도깨비 학교라도 좋아
용전리는 '둔전평'이라는 거창한 옛 이름을 지닌 마을이다. 둔전답이 평야를 이룰 만큼 농사가 성했고, 그 흔적은 도 지정 문화재로 전국대회 국무총리상까지 챙긴 바 있는 '둔전 농악'으로 남아 있다. 빚 농사로 통하는, 그나마 있던 논들은 감자 배추 약초(당귀) 심는 밭으로 바뀐 지 오래. "감자밭 1,000평 갈아서 인건비에 종잣대 비료값 떼고, 도지세 내고 나면 100만원 돈이나 남나? 사는 게 아니래요." 젊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마을을 떠났고, 한 때 학생 수 300명에 이르던 용전국민학교는 분교로 강등(2000년)되더니 지난 해 초 6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중학교도 지난 해 9명 졸업하고, 올해 3명 들어갔더랬어요." 중학교까지 폐교되면 명색이 면 소재지에 학교가 하나도 남지 않을 판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도깨비 학교라도 좋다"는 심정이다. 용전리에서 '시내'로 통하는, 진부행 버스를 기다리던 황옥례(81) 할머니도 "내가 뭐 아나"면서 그렇게 덧붙였다.
하루 관객 2,000명은 자신 있다
교사(校舍)는 손을 봐야 한다. 10년 무상임대를 얻은 김 교수와 그의 '강원·기원오페라단'은 2층 건물 8개 교실 중 아래 위층 4개를 터서 180석 규모의 실내 공연장 및 연습실을 만들고, 나머지는 오페라 박물관과 소품실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운동장도 잔디를 깔아 상설 야외무대를 앉힌다는 구상. 정부에서 4억원의 리노베이션 비용을 지원했고, 문화관광부와 도·군도 첫 축제(7.25∼8.15)에 쓰라며 적지 않은 예산을 보탰다. 공사가 지연돼 이 번 행사는 가설무대에서 치러지지만 출연진과 스탭, 작품은 국내 최정상급이 될 것이라는 게 주최측의 설명이다. "아무리 산골 오지라도 'god'가 뜨면 사람들이 몰리잖아요." 한 관계자는 하루 평균 못해도 관객 2,000명은 자신 있다고 했다. 수년 전 '태백산상오페라'로 오페라 대중화에 성과를 낸 김 교수는 '문지방 문화'라는 표현을 들이댔다. "어떤 문턱을 지나느냐에 따라 삶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슬리퍼 끌고 온 엄마가 아이에게 젖병을 물린 채 오페라를 보고, 거대한 합창소리에도 경기 한 번 안하고 젖병을 빠는 아이를 넋 놓고 바라 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가산 이효석이 태를 묻은 곳이라 '메밀꽃 필 무렵 오페라 학교'라는 멋진 이름을 단 학교는 주말 상시 오페라 공연 뿐 아니라 주민들이 참여하는 농악학교, 판소리 배우기, 도자기 빚기 오페라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두고 있다. 영어·일어 안내문도 5만 장을 찍어 문광부와 재외 공관을 통해 배포한다는 계획이다. 주민들에게는 모든 것이 무료이고, 외지 관객에게도 실비(2만원 내외) 수준의 관람료만 받을 참이다. 그는 "100년씩 된 소나무를 병풍 삼고 700고지 별빛을 지붕 삼아 에어샤워를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청정오페라이자 세계 유일의 문화컨텐츠"라며 "교통이나 숙박시설 등 주변 여건도 좋아 관객 동원에는 자신있다"고 장담했다.
마을의 학교 도우미들
부녀회를 주축으로 한 주민들의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조만간 흰 꽃이 앉을 감자 밭도 북돋워야 하고 봄 배추 모종도 심어야 하지만 짬짬이 축제 도우미 계획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부녀회는 학교 옆 마을회관 취사시설을 이용해 외지 관광객들에게 토속 음식을 팔 계획이다. 비온 날 맞춰 열린 얼마 전 회의 때는 "메밀막국수는 3,500원씩 받고, 도라지 고사리 참나물 넣은 신토불이 산채비빔밥도 메뉴에 넣자"는 안이 나왔다. 메밀부침, 감자부침에 인근 봉평 메밀꽃술과 장평 막걸리도 가져다 팔자는 제안도 있다. 먼저 마을회관 페인트칠도 새로 하고, 지난 겨울 터진 보일러도 갈아야 할 판이다. "손님들이 서울서 좋은 것만 자시던 분들 아니래요." 부녀회장 주금자(52)씨는 '식당보다 깔끔하고 맛있고 싸게'가 부녀회의 신조라고 했다. "교수가 교수 티 안내고 싹싹한 게 밀어줘야 것습디다. 그게 오페라학교도 살고 마을도 사는 길 아니래요." 마을 최대 행사로 치던 군 체육대회 때 600∼700명 손님을 치렀던 게 그간 부녀회의 음식 품앗이 최고 기록. 부녀회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창=최윤필기자 walden@hk.co.kr
22일간 공연에 최소 10억 들어
야외공연장으로 활용될 용전분교는 담장이 없다. 듬성듬성 선 나무와 어른 배꼽 높이의 성긴 쇠울타리가 담장이고, 그나마도 없는 곳이 절반이다.
공연이 산만해질 수 있는 만큼 간이 막이라도 치자는 게 기획사의 제안. 축제 및 공연 주체인 (사)강원·기원오페라단과 김기원 교수의 뜻은 일단 열린 무대를 고수하자는 쪽이다.
22일간 공연될 야외 오페라 준비에 최소 10억원이 든다. 그래서 서울 '예술의 전당' 의 경우 어지간한 공연석 자리 값이 10만원도 우스운 수준이다. 1인당 2만원 내외를 받고, 그것도 청소년 이하는 무료로 보게 해서 타산을 맞출 수 있을 지도 불안한 대목이다.
무대에 올릴 오페라는 출연진으로 보나, 연출·무대 등 스탭으로 보나 국내 정상급. 갖춰진 곳에서만 공연하던 이들이, 따지자면 가깝지도 않은 곳까지 와서 지속적으로 무대를 지켜 줄 지도 낙관하기 힘들다.
으레 어떤 일이건 시작되면 좋은 소리, 싫은 소리가 엉키고 설키기 마련. 공연 날마다 빚어질 교통대란·주차전쟁은 접어 두더라도 오페라의 생경한 발성이 연로한 주민들의 초저녁 잠을 방해하는 소음으로 찍혀 성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가장 척박한 곳에 가장 고급스런 문화를 뿌리내리는 데 따르는 성장통(成長痛)으로 여겨졌고, 주민들도 일단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 원래 평창 메밀은 땅이 기름지면 키만 멀대처럼 자라기 때문에 척박한 땅이라야 소출도 맛도 좋은 작목이라고 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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