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홍 지음 산처럼 발행·1만5,000원1899년 9월 18일, 조선 땅에 처음으로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일본이 건설한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 경인선이 개통된 것이다. 당시 독립신문 기자는 다음과 같은 시승기를 남겼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기적을 울리며 나는 듯이 달리는 철마에 조선 사람들은 놀라고 감탄했다. 걷거나 말 타고 다니는 게 전부이던 시절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기차는 근대와 진보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경탄은 오래지 않아 신음으로 바뀌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철도는 일제가 조선의 골수를 빼가는 수탈의 도구가 됐기 때문이다.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은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지은이 박천홍은 서평지 '출판저널'의 편집장 출신 자유기고가다. 이 책이 첫 저작이다. 그는 이 책을 "철도가 그려놓은 오욕과 수치의 한국 근대사를 들여다보려는 시도"라고 설명한다. 책은 근대사 100년 중에서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다루고 있다. 일제의 손아귀 안에서 철도 레일을 따라 펼쳐진 조선의 근대는 비틀린 모습을 띨 수 밖에 없었다. 지은이는 "한국 근대의 악몽은 증기기관차의 거대한 몸체에 내려앉았다"고 표현하면서 "우리에게 철도는 근대의 축복이 아니라 제도적 폭력의 서막이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제는 철도를 통해 본 근대성의 고찰이다. 지은이는 철도의 등장이 전통적인 시공간 개념이나 생활문화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추적한다. 철도가 단순히 새로운 교통 수단에 그치지 않고 근대화의 촉매 역할을 했음을 서구의 경험과 대비해가며 많은 실증적 사료를 들어 설명한다. 일례로 "철도는 근대적 시간 관념을 각 지역으로 전파하는 선구자였다." 시계 볼 일 없이 살던 사람들이 열차 시각표에 맞추느라 정확하고 규칙적인 근대적 시간을 배웠다는 것이다. 남자칸 여자칸이 따로 없는 기차는 남녀칠세부동석의 엄격한 관습도 깨뜨렸다. 그래서 "기차놈, 빠르기는 하다마는 내외법을 모르는 상놈이구나"하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철도로 말미암은 한국 근대의 풍경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개화기 신소설이나 일제시대 소설 등 많은 문학작품을 동원해 풍성한 읽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1876년(고종 13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기수가 쓴 조선인 최초의 철도여행기 '일동기유(日東記遊)'를 비롯해 이인직, 최찬식 등의 신소설과 이광수, 염상섭, 이 상 등의 일제시대 소설까지 두루 섭렵해 당시 조선인들에게 철도가 어떤 모습으로 비쳤는지 보여준다. 덕분에 철도를 통한 근대화라는 딱딱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힌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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