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 지음 책세상 발행·4,900원100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도덕적으로 그런 희생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정치·사회적으로는 어떤가. 특히 공동체를 이끌거나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가.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대한 시사적 대답을 담고 있다. 서남대 교수인 저자는 정당하고 효율적인 정치 행위의 모범을, 권모술수의 정치인으로 잘못 알려진 마키아벨리(1469∼1527)에게서 찾고 있다. '군주론'(1513년)이 연상시키는 마키아벨리즘은 흔히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 같은 이해를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오해라고 본다. 우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할 때 이 '목적'은 '좋은 목적'을 뜻한다. 가치지향적 개념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여기서 좋은 목적이란 공익을 뜻하며 공익 추구가 군주의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본뜻이라고 풀었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는 이기적 개인을 공동체로 통일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획득하는 존재이다. 군주가 사용한 나쁜 수단은 공익을 위해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승만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 역대 우리 대통령의 통치 행위를 이런 마키아벨리즘을 기준으로 평가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건국 과정에서 헌법 제정 권력의 정당성보다는 정치적 승리가 중요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승리는 그의 승리일 뿐 이 땅의 민중의 승리는 아니었다.
아마 그가 권모술수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헌법 제정 권력의 정당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소외돼 가는, 그러나 힘을 가진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승만의 통치는 마키아벨리즘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오로지 사익을 위한 정치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미지로 보아 박정희 대통령은 아주 마키아벨리즘에 근접해 있다. 그가 쿠데타 과정에서 내세운 대의명분은 마키아벨리즘의 전형이었으며 이후 대일 청구권 협상과 월남 파병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이런 좋은 목적이 반드시 자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사익이 생김으로써 박정희는 파멸하고 갖은 해악을 낳았다고 평가한다.
정권 획득 자체가 목적이던 김영삼 대통령은 마키아벨리즘과는 무관하며, 김대중 대통령은 마키아벨리즘을 지향했지만 뛰어난 마키아벨리스트는 아닌 듯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온갖 정당성의 문제에 시달렸던 과거 정권과 다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국민들의 높아진 기대가 어떤 것인지를 간파하고 행동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을 전형적 반마키아벨리스트(좋은 목적을 위해 좋은 수단을 사용한다)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반마키아벨리즘은 그것이 결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치행위로는 결국 반마키아벨리즘이 마키아벨리즘을 능가할 수 없다는 믿음도 깔려 있다.
'집단 사이에 사회적 혜택이 왜곡되는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저자의 너그러운 해석은 마치 500년 전 이탈리아 정치가의 사상이 존 롤스의 '정의론' 수준에 이르는 정치·사회철학이라는 느낌까지 들게 한다.
하지만 과연 나쁜 수단을 앞에 두고 누가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판정해 줄 것인가, 설혹 그런 판정이 나더라도 누가 다수에게 그런 나쁜 수단을 참으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는 여전한 문제로 남는다. 이런 질문들이 오히려 이 책의 초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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