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예페스 엮음·이수영, 민병직 옮김 굿모닝미디어 펴냄·1만2,000원'액션 영화의 외피를 뒤집어 쓴 인간의 의식에 관한 학위논문'인가, '철학자의 외피를 둘러싼, 머리는 텅 빈 액션 영화'인가. 앤디 워쇼스키와 래리 워쇼스키 형제의 화제 문제작 '매트릭스'(1999년)에 던져진 14개의 질문은 크게 보아 이 둘로 나눌 수 있다. '매트릭스'에 관한 14개의 글을 엮은 이 책은 후반부에 실린 과학자들의 지루한 에세이만 빼면 철학자, SF 소설가, 경제학자, 언론학자, 영문학자, 소프트웨어개발자, 종교학자 등이 저마다 포스트모더니즘, 인공지능, 자유의 문제, 실재론 등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영화를 점검한다. 원제는 '빨간 알약 먹기'(Taking the Red Pill)로, 빨간 약은 영화에서는 '먹으면 가짜 세계인 매트릭스에서 진짜 현실세계로 가게 되는 약'을 이른다.
서론 격인 1장 '매트릭스는 무엇인가'는 기계들이 인간을 기계를 위한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암울한 미래의 테크놀로지 사회 시스템인 매트릭스에 대한 간결한 안내문. 나머지는 '매트릭스'에 대한 다채로운 찬반 논쟁이다. 먼저 반론을 살펴보자. '우리의 주인은 매트릭스 이전에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라며 주인공 네오와 인류 저항군에 회의적 입장을 보이는 경제학 교수 로빈 핸슨이 대표적이다.
앤드류 고든처럼 전면적 비판에 나선 사람도 있다. 그는 '구세주의 개입'이라는 영화 주제는 사람들이 굳이 정치적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현실 재현의 불가능성을 논한 보드리야르를 인용하면서도 정작 명확한 이분법으로 진짜와 가짜를 나눌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니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장식품으로만 쓴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날카롭다. 결국 이 영화의 관객은 '보드리야르를 읽는 한줌의 엘리트'가 아니라 '만화와 컴퓨터를 먹고 자란 세대'라는 비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영화의 과도한 폭력과 상업성, 가부장적 지배 찬양에 대한 비판(9장 '불교, 신화, 매트릭스')도 빠뜨릴 수 없다. 가령 영화는 정부 청사 로비에서 네오의 총탄에 맞아 죽는 이들에 대해 아무런 동정심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찬성론은 '주인공이 칙칙한 사무실 칸막이 안에 갇혀 있다가 정신적으로 눈을 뜨고 감옥에서 벗어나는' 매력적인 전망(11장 '매트릭스에 신은 있는가')과 '파란 알약을 선택하고 현실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빨간 알약을 택한 뒤 얻는 모험과 성취의 기쁨'이라는 자유에 대한 환기(10장, '인간의 자유와 빨간 알약')를 옹호한다.
14명의 논자들이 벌인 '매트릭스' 심포지엄은 한 번쯤 고민해볼 만한 심각한 문제를 환기한다. 물론 거꾸로 '기껏해야 액션 영화 한 편에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야 하다니' 하는 탄식을 뱉을 수도 있다. 영화를 꼼꼼히 본 뒤 역주까지 단 옮긴이들의 정성과 부록으로 첨부한 매트릭스 어휘집마저도.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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