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 인형의 실패는 나를 공격하기 위해 벼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기가 막힌 호재였다. 실제로 회사는 무려 50만 달러에 이르는 손해를 봤다. 이들은 회사에 손실을 끼친 만큼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연일 집중포화를 퍼부었다.정말 괴로웠다. 무엇보다 그 동안 나를 믿어 준 H회장을 볼 면목이 없었다. 결국 나는 회장을 찾아가 사표를 내밀었다. 하지만 H회장은 "윤 이사, 당신이 벌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다음에 잘해봐"라며 사표를 끝내 받지 않았다.
결국 다시 회사를 나왔지만 반대파들로 인해 내 운신의 폭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일해온 직원들을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 내보냈고, 내가 전권을 행사하던 서울지사 업무에도 사사건건 간섭했다.
'이런 수모를 당하며 더 이상 자리에 붙어 있을 수는 없다.' 1984년 2월 나는 H회장에게 우편으로 사표를 보냈다. 해운공사 2년, JC 페니 5년, 화승 3년. 10년에 걸친 직장생활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는데 마침 알고 지내던 후배가 찾아왔다. 예식장 사업을 하고 있던 후배였는데, 국제 무역에 밝은 내가 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사업 이야기를 꺼냈다. 친척이 미국 앨러배마주에 상당한 규모의 삼림을 소유하고 있는데 나무를 베어서 한국으로 들여와 국제적인 목재사업을 한번 벌여보자는 것이었다. 성사 가능성은 의문이었지만, 나는 바람이나 쏘일 겸 후배를 따라 미국에 갔다.
과연 앨러배마주에 있는 산판의 규모는 엄청났다. 목재사업을 벌여 잘만 하면 큰돈을 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것저것 알아보기 위해 한 달이 넘도록 돌아다녔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벌목을 하려면 미국 산림청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허가를 받기에는 나무의 수령이 모자란다는 판정이 나온 것이었다. 크게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사업 계획이 물 건너 가자 허탈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당시 내게는 두 아이가 있었다. 화승에서 뛰쳐나오면서 퇴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계속 놀고 있던 터라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하고 돌아가자.'
나는 산판 일이 수포로 돌아간 후 후배와 함께 이탈리아행 비행기를 탔다.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드는 사업의 미국 시장 판권은 호머 알티스가 이미 가져갔지만, 한국 시장에서 한번 사업을 벌여볼 속셈이었다.
휠라 본사는 이탈리아 북부 소도시 비엘라에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유럽의 풍경에 반한 후배의 성화로 비엘라로 가기 전 로마는 물론, 베니스까지 돌아다니며 관광을 다녔지만, 내 머리 속에는 온통 휠라 생각 뿐이었다.
비엘라로 곧바로 가는 교통편이 없어서 밀라노에서 하루 밤을 지낸 뒤 수소문 끝에 비엘라 휠라 본사를 찾았다. 그러나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찾아간 휠라는 동양의 이름 모를 사업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미국에서 파는 휠라 신발을 만드는 한국에서 휠라 신발 사업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은 시장 규모가 너무 작지 않습니까. 게다가 휠라의 아시아 지역 판권은 이미 일본에서 가져갔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지만 철없는 후배는 그런 내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물려받은 재산만 해도 상당했던 후배는 이탈리아까지 왔으니 내친 김에 프랑스까지 들렀다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사실 그 때만해도 해외 여행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유럽 땅을 밟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후배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가다시피 프랑스까지 같이 갔지만, 마음이 편치 못했던 터라 결국 언쟁이 벌어졌다.
"너는 돈 좀 있다고, 돈 없는 사람의 처지를 그렇게 모르냐." 씁쓸한 심정으로 귀국한 뒤 나는 다시 사업 준비에 들어갔다. 더 이상 놀고 있을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을 다녀왔던 후배가 자신이 갖고 있던 여의도의 예식장 건물 한 구석을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는 조건으로 빌려주었다. 변변한 사업자금 없이 사업을 시작한 상황이라 그것만 해도 큰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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