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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블레어와 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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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블레어와 룰라

입력
2003.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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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명은 '부시의 푸들'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비아냥거린다는 것을 나의 유권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누구는 누구의 애완견이라네…." 수모가 아닐 수 없었다. 지지율은 떨어지고 같은 당 소속인 장관들마저 나의 이라크 선제 공격 정책에 등을 돌려 사표를 던졌다.이라크 문제가 유엔에서 한창 시끄럽던 작년 9월 7일. 나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한 기자회견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찍은 위성사진과 보고서는 이라크가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바로 IAEA 대변인의 반박이 튀어나왔다. "새로운 위성사진이나 보고서는 없다. 문제의 사진은 상업위성이 찍은 것이다." 세계적인 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올 4월 9일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나는 그동안의 고심참담을 당당히 딛고 일어섰다. 이제는 느긋하게, 내 친구에게 주눅 든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 총리를 향해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힘을 인정하고 미국과 잘 지내는 것이 유럽이 나아갈 길'이라고 충고까지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로부터 "잘 한 결단"이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현명하신 독자 제위께서야 첫 줄만 보고도 벌써 아셨으리라.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50)씨 이야기다. 여기서 '영국이 미국에 붙기를 잘했다'는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블레어 총리는 지도자로서 방향을 한 번 선택한 이후 때로는 간곡한 호소로, 때로는 어설픈 허풍으로, 때로는 하야의 배수진까지 치면서 그 결정을 밀어붙였다. 동료 의원들의 야유에는 별 설득력 없어 보이는 강변으로, 언론의 모진 비판에는 국가의 미래를 건 비전이라며 맞섰다. 사투였다. '내 깊은 뜻을 너무들 몰라 준다'는 식으로 원망한다거나 투정을 부리는 법은 없었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54) 대통령은 또 어떤가? 작년 말 당선 직전까지도 언론들은 "불안하다"고 떠들어댔다. 노동자에서 노조위원장, 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지는 좌파 경력과 노선을 집중 부각시켰다. 과장만도 아니었다.

그러나 취임 다섯 달 만인 6월 1일 그는 남미의 대표주자로 G8(서방 선진 7개 국+러시아) 정상회담에 초청받아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시쳇말로 룰라 대통령은 요즘 '룰루랄라' 하고 있다.

하지만 시련이 많았다. 긴축과 안정, 개혁을 추진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우선 룰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노동당 내에서부터 "국제 금융자본이 그렇게 무섭다면 전 정권의 신보수주의와 뭐가 다르냐?"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농민들도 토지개혁이 지지부진하다며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재무장관 등 주요 포스트에 검증되고 인정받는 인물을 앉히고 '예기치 않은 보수주의'(파이낸셜 타임스)라는 지적을 들어가면서도 뚝심 있게 소신을 밀고 나갔다.

여기서 그의 보수·우경화가 옳았다거나 앞으로도 아무 탈 없이 잘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두 지도자의 사례가 요즘 대한민국과는 뭔가 다른, 새겨볼 만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질타조차 맥이 빠지고, 쓴소리 할 의욕마저 사라진 사람들이 늘어간다면 희망은 점점 멀어진다.

딱 한 마디. 군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골부리지 않는다 했다. 또 잘못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 했다. 하물며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를 증진하는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 대통령임에랴.

이 광 일 국제부 차장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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