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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여성생활수기 최우수작 이미애 / 인생역경의 긴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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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여성생활수기 최우수작 이미애 / 인생역경의 긴 터널

입력
2003.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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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14년 동안 가정법원에 이혼을 세 번이나 신청했다. 직업이 일정치 않은데다 경제관념도 없고 생활태도 마저 불성실한 남편 때문에 결혼생활은 늘 위태로웠다.그런데 결혼 10년 만에 늦둥이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이 복덩이였는지 아니면 나도 행복을 누릴 때가 된 건지 결혼 후 그때처럼 마음 편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너무 행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일곤 했다.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런 생각들이 모여서 결국 엄청난 사건을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간 남편이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1999년 4월30일 일요일 새벽 3시경, 꼬박 서른 시간 동안 연락이 없던 남편이 경찰서에 있다며 연락을 해왔을 때 직감적으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남편은 "별일 아냐. 누가 다쳐서 그러는데 잠시 참고인 조사만 받고 집에 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려니 했다. 남편은 처신에 있어서 언제나 정확한 사람이고 한 치의 실수도 용납 못하는 칼 같은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앞뒤 없이 "뭔가 꼬이고 있어. 이거 뭐가 크게 잘못되고 있어"라는 전화와 함께 옷 한 벌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워낙 겁이 많고 소심하니 처남을 보내라"고 했다.

그날 남동생이 체육복을 들고 경찰서로 가 남편을 만난 뒤 바로 집으로 왔다. "내막은 나도 잘 못 들었어. 그냥 매형과 함께 있었던 기장 택시기사를 찾아야 알리바이가 증명된대." 중학교 때 고막이 터져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남동생은 남편과의 면회에서 사건의 내막을 잘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증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황당했다. 무슨 사건이기에 증인까지 찾아야 되는지 답답했다. 그러나 한시라도 서둘러야 한다기에 주섬주섬 들은 대로 전단지에 옮겨 적었다. A4 용지에 팔이 아플 만큼 적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아이들이 자는 시간에 나가서 기장 시내 전봇대마다 전단지를 붙였다.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다 날이 새자마자 남편을 면회하러 경찰서로 가니 담당자가 안 된다고 했다. 면회금지 피고인이라고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더구나 피의자 명단을 언뜻 보니 남편의 이름 옆에 '살인미수'라고 죄명이 크게 적혀있지 않는가. 순간 손이 벌벌 떨리면서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담당형사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반말로 "OOO씨 처되는 사람이요? 여기 OOO씨가 칼로 찌르는 걸 본 목격자가 있어. 그런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라고 윽박지르며 나마저도 죄인처럼 대했다. 바로 그때였다. 남편이 수갑을 찬 손을 앞으로 모으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왔다. 이틀사이 무척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놀란 눈으로 남편이 날 바라보며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당신이 사람을 죽이려고 했어요?"

"아니야. 정말로 난 안했어. 날 믿지?"

남편의 눈은 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도 남편의 속마음을 읽기 위해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편의 눈빛에서 "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을 잊고 행동할 사람은 아니야"라는 답을 얻었다.

가족과의 면회는 금요일에야 풀렸다. 5일만이었다. 난 그동안 낳은 지 채 두 달도 안 된 아들을 아픈 어머니께 맡기고 증인을 찾기 위해 새벽 교대시간에 맞춰 가스충전소와 택시회사 앞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등 기장 시내를 미친년처럼 헤집고다녔다. 교통사고 목격자를 찾는다는 플래카드를 보면서도 남의 일처럼 여겼는데 그게 바로 내 처지가 될 줄이야….

디스크 말기환자로 늦둥이를 낳고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무리하게 닷새를 밤낮없이 걷고 다녔더니 몸에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그러나 통증의 깊이와 횟수가 잦아질수록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미워서 함께 살기조차 싫었던 남편이 막상 큰일을 당하고 나니 그렇게 소중하고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부부란 참 질기고도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것을 그때 가슴 깊이 깨달았다.

그러나 담당 형사의 불친절로 여전히 남편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다가 금요일 오후에야 남편을 면회해 의심쩍은 부분을 물을 수 있었다.

남편은 "진짜 범인을 알고 있어 수사에 도움을 주려고 경찰차에 동승했더니 엉뚱하게 나를 범인으로 몰고 갔다"며 분을 참지 못했다. 전과 8범인 피해자는 합의금을 많이 받기 위해 남편을 공범으로 몰아갔고, 진짜 범인은 둘이서 범행을 했다고 하면 죄가 훨씬 가벼워진다는 형사의 회유에 넘어가 남편을 공범으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억울했지만 피해자가 자기를 지목해 범인이라 하고 다른 범인도 또한 같이 했다고 자백한 만큼 진실이 설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남편은 운명의 수레바퀴에 끼어 위험한 방향으로 자신이 끌려가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정말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가 보다. 남편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유일한 증인인 택시기사를 찾은 것이다.

택시기사는 사건의 전말을 남편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남편은 절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자신이 남편과 헤어진 뒤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 직접 가서 모든 정황을 목격했다는 설명과 함께.

말 그대로 가뭄에 단비라고나 할까.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곧바로 남편을 만나 택시기사를 찾았다고 했다. 남편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스쳤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공증부터 해라고 말했다. 공증을 한 증인은 검사실로 몇 차례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남편은 검찰로 넘겨져 기소됐고 살인미수죄란 끔찍한 죄명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거짓자백을 협박받았고 그걸 거절하자 숱한 폭언과 치욕적인 고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했다. 가족과의 면회까지 금지시키며 입을 막고 허위로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한 형사의 명예욕도 참기 어려웠다.

꼬박 6개월에 걸친 인권유린과 구치소안의 굴욕적인 생활 속에서도 남편이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신을 하루같이 기다리는 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늦둥이 아들이 크는 걸 보고 싶다고 해서 보낸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 그리움과 설움에 섞어 삼켜야 했던 남편의 절절한 몸부림은 글로 옮기기조차 힘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남편은 결국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검찰 항소, 상고가 이어졌지만 사건 발생 2년10개월만인 2002년 4월 23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때 우리 가족이 느낀 자유와 기쁨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긴 세월동안 우리 가족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결혼 8년 만에 기장이란 외진 시골에 직접 지은 우리 집이 그 사건으로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세상을 온통 잃은 것만큼이나 마음이 아팠다. 너무 아름다운 추억이 숨쉬고 있어 쫓겨날 때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서성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남편의 알코올중독이었다. 남편은 수시로 불려나가는 재판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매일 술을 마셨다.

맨 정신으로는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했다. 세상이 자기를 버려 자기도 막 살아진다고 했다. 그런 정신으로 예전에 하던 학원 일을 다시 한다는 건 무리였다.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야 했는데 나도 모든 면에서 하도 찌들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우리 부부는 세상을 원망하다가 삶의 의욕마저 상실해가고 있었다.

밀린 집세 때문에 무언가 일을 해야 했다. 찌든 마음과 디스크통증을 이겨내며 찾은 일은 과외였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일이 예전에 알던 학원생들을 찾아 싼 수업료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남편은 내가 과외를 하는 동안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이 사건에 대한 소송을 준비했다. 그러나 변호사 선임비를 마련할 형편이 못돼 남편은 혼자서 소송을 시작했다. 끝이 없는 투쟁이었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남편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명예회복만은 해야 한다며 눈만 뜨면 소송에 매달렸다. 이런 과정에서도 남편는 하루도 술 없이는 살지 못했다. 찌들고 피폐한 정신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난 보듬어주고 쓸어주고 싶지만 내가 겪는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 남편을 그렇게 마음같이 다독여주지 못했다. 남편에 대한 처음의 원망이 차츰 남편조차 피해자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랫동안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그냥 부부라 불리며 살아온 세월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이제 술을 거의 않을 만큼 건강해졌고 사채를 얻어 새로 낸 학원도 서서히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소송도 마무리단계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소송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그 무엇으로도 우리 가족이 흘린 피와 눈물을 보상하지는 못할 것이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옛말처럼 우리 가족도 그 엄청난 사건으로 더욱 사랑하고 아끼게 됐다. 앞으로 우리 가족의 슬픈 사연이 치유되고 명예가 회복돼 그 사건을 웃으며 이야기할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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