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앞바다의 팔미도에 경사가 났다. 섬 정상에 있는 등대가 다음달 1일 100살 생일을 맞기 때문이다. 1903년 6월 1일 건설된 국내 최초의 등대. 뱃사람의 안녕을 위해 바다에 불 밝힌 시간이 한 세기에 이른 것이다."감격스럽습니다."
불을 밝히는 등대 소장 허 근(58)씨의 짤막한 소감 속에서 등대지기의 자랑스러움이 전해진다.
팔미도는 인천에서 서쪽으로 16.7㎞ 떨어진 섬. 등대지기와 군인만 있고 주민은 살지 않는 무인도다. 해발 71m 정상에 세워진 등대는 전국 2,040여 등대의 맏형으로 인천항 출입 선박의 길잡이 노릇을 해왔다.
등대 생활 30년, 정년퇴직을 앞둔 허 소장 옆에는 민병권(45), 이정민(38)씨 등 2명의 등대지기가 있다. 경력은 민씨가 20년, 이씨가 10년이다. 3년 전 팔미도에서 만난 이들은 인천해양수산청 항로표지과 소속이다.
이들은 밤중에 가시거리 20마일 가량의 섬광을 10초에 한 번씩 바다에 보내고 낮에도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리면 30초에 한 번씩 '붕 붕' 무(霧)신호를 보낸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일이지만 사람 목숨과 연관된 중요한 일이기에 자부심은 남다르다.
외롭고 힘들 것 같지만 이들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한다. 막내 등대지기 이정민씨는 "각자 15평 남짓 별도 숙소가 있다"며 "한달에 일주일 가량 육지에서 휴가를 보내고 가족과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어 생활은 편하다"고 말한다.
2교대 혹은 3교대로 돌아가며 근무하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육지로 휴가 다녀올 때는 쌀, 김치 등 음식과 부식을 챙겨와 나눠 먹는다. 맛있는 것 함께 먹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들은 진한 동료애를 확인한다.
이씨는 "비번일 때는 빨래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며 "가끔 섬에 주둔한 인천방위사령부 소속 군인들과 족구, 농구를 한다"고 말했다.
팔미도 등대 100년은 축하할 일임에 틀림없지만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그것이다. 조선 침탈을 노리던 일제가 등대 설치를 요구했고 조선 정부가 이를 수용해 탄생한 첫 등대가 바로 팔미도 등대다. 일제가 인천 길목에 위치한 팔미도의 지리적 중요성을 간파, 등대 건설을 강권하다시피 하자 조선이 1902년 5월부터 건설을 시작, 이듬해 6월 높이 7.9m, 지름 2m의 등대를 완성했다.
이렇게 탄생한 팔미도 등대는 한국전쟁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전쟁 초기 섬이 북한 수중에 넘어가자 미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KLO) 대원 25명이 상륙, 4일만에 탈환했다. 1950년 9월15일 새벽 등대가 불을 밝히는 가운데 인천상륙작전은 이뤄졌다. 등대 옆에는 이를 알리는 표지판이 지금도 서있다.
등대는 맨 처음 석유등을 사용했다. 1954년 자가발전시설을 갖춘 뒤 백열등, 수은등, 할로겐등 등을 거쳐 91년부터는 태양광발전장치를 이용해 불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불 밝힐 날은 얼마남지 않았다. 내년 초 바로 옆에 들어서는 첨단 등대에 자리를 물려주고 인천시 지방문화재로 보존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정민씨는 "새 등대는 시설과성능이 좋아 일하기 편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내면서도 "친구처럼 가까워진 옛 등대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해양수산부는 팔미도 등대 100주년을 기념해 사진집 및 100년사 자료집을 발간하고 등대 체험 이벤트도 마련할 계획이다.
/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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