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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금연記]정진상 성균관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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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금연記]정진상 성균관대 의대 교수

입력
2003.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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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7월. 가족과 함께 미국 보스턴 터프츠대로 유학을 떠나는 길에 나는 공항 면세점에서 담배 8보루를 샀다. 미국의 담뱃값이 무척 비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골초였던 나는 4인 가족이 살 수 있는 최대 한도까지 담배를 구입했다.그러나 미국에서 담배 피우기란 엄청난 고역이었다. 병원은 금연구역이라 담배를 피우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다 주위를 보면 흑인과 노무자 뿐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싫어 '담배 몰아 피우기'를 시작했다. 업무중에 담배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출근 전에 마구 피우고, 점심 시간에는 흡연구역이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오후에 피울 담배를 몰아 피웠고, 퇴근길 승용차 안에서 하루 종일 부족했던 담배를 보충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난 10월11일. 공항에서 사온 담배가 동이 났다. 또 미국인 동료 의사들이 내가 흡연자라는 사실을 알고 꺼린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때 이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가족들에게 절연을 선언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반응은 "또?"였다. 그날 이후 나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 금단현상도 의외로 약했다.

흡연으로 인한 심장질환, 뇌졸중 등을 치료하는 신경과 의사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하루 2∼3갑을 피운 '17년 골초'였다. 담배는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75년부터 피웠다. 잦은 시험 준비로 인한 스트레스를 담배 연기에 실어 날려버리면서 나는 서서히 골초로 변해갔다.

금연에 성공한 이후 가장 좋은 것은 환자들에게 금연을 강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학을 떠나기 전 환자들에게 "담배를 끊어라"고 권유하면 "박사님이 끊으면 나도 끊겠다"는 답변이 되돌아와 할 수 없이 "그럼 좀 줄이세요"라고 말을 끝내기가 일쑤였다. 유학 전에 만난 한 할아버지는 지금도 사무칠 정도로 기억에 남는다. 발가락 버거씨병을 앓았던 할아버지는 유학 후 다시 만나보니 담배를 끊지 않아 발가락이 아닌 발목을 잘라야 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금연 중이었다면 좀더 강권했을 테고, 그러면 할아버지도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죄책감이 밀려 들었다.

이후 나는 금연전도사를 자청했다. 환자들은 첫 상담 때 금연서약서에 사인을 하게 하고, 담배는 압수한다. 후배 의사들에게도 "돌팔이가 되기 싫으면 하루 빨리 끊어라"고 강조한다. 17년 골초생활을 우여곡절 끝에 청산한 사실도 모르고, 두통 클리닉에서 만나는 환자들이 "박사님은 담배를 안피워서 환자 마음을 잘 모른다"고 말할 땐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내가 대하는 폐암, 뇌졸중, 심근경색 환자들은 대부분 심각한 흡연자다. 여러분들도 그런 병에 걸리고 싶으신지. 그래도 좋다면 담배를 피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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