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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7>동백림 사건(上)-평양으로부터의 고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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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7>동백림 사건(上)-평양으로부터의 고변

입력
2003.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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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67년 7월 8일 '동백림(東伯林·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 사건 제1차 진상발표문'을 발표했다. '대학교수와 의사, 예술인 및 공무원 등이 1958년 9월부터 67년 5월 사이에 동독 주재 북괴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접선, 간첩활동을 해왔다. 현재까지 194명이 연루됐으며, 특히 명지대학 조교수 임석진(林錫珍)박사 등 7명은 소련·중공 등을 경유하여 직접 평양을 방문, 밀봉교육을 받고 귀국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중앙정보부는 이어 11∼15일과 17일까지 매일 한차례씩 '제7차 진상발표문'까지 추가해 관련자들의 혐의사실을 발표했다. 특히 3차 발표문과 6차 발표문에서는 당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재서독 음악가 윤이상(尹伊桑·당시 50세)씨와 재불 화가 이응로(李應魯·당시 64세)씨가 연루돼 구속 수감되었음을 발표하고 "임의동행 형식으로 이들을 한국에 데려왔다"고 밝혔다.

이 사건의 발단과 관련, 당시 서독에서 유학하던 중 평양을 2회 방문했던 임석진(71·명지대 명예교수·한국헤겔학회장)씨의 설명. "귀국 후 대학 강의를 맡고 있었다. 북한을 배신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 불안감이 컸다. 그들이 나의 모든 것을 항상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5월 3일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고, 6월 8일 7대 총선에서 공화당이 신민당에 압승(의원수 157 대 61)했다. 특히 총선을 둘러싸고 대학생과 야당을 중심으로 한 부정선거 시위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다. 그러한 데모의 배후에 북한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평양을 두 번이나 방문했던 나로서는 유럽 우리 유학생들의 실상과 북한의 의도 등을 정부에 알리는 것이 나는 물론 비슷한 처지의 유학생들에게도 '살 길'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더구나 이 같은 사실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신고하는 것보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고변하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김형욱은 워낙 무지막지했으니까. 결국 박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후 수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안이 훨씬 크게 부풀려졌다. 이후 윤이상씨 등은 인터뷰에서 나를 '중앙정보부의 첩자'로 몰아세우기도 했지만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과 수사 관계자들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67년 초부터 북한의 대남공작이 활발해지고 그 대상이 북측이 활동하기 쉬운 유럽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특히 북측은 유럽의 유학생 등을 포섭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공작단'을 만들어 남한으로 우회 침투하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일간지 특파원이 체코의 프라하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동베를린은 유학생들이나 교민들의 왕래가 더러 있었지만 프라하는 달랐다. 그 곳에는 특파원이라 할 지라도 용이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파원의 실종은 해당 신문사에서 알려 주었다. 그 동안의 정보와 그 사건을 계기로 서독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북한의 공작에 대한 심각한 내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상부로부터 '임석진 교수의 고변'이 있으니 조사해 보라는 지시와 그의 자술서를 전달 받았다. 임 교수의 고변이 사실 확인에 많은 참고가 됐음은 사실이다."

이후 이 사건은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단 사건'으로 발전했고, 서독과 프랑스의 기자는 물론 정부의 공식 항의단 등이 국내에 들어와 관련 피고인의 재판을 방청하는 등 국제적 관심사로 비화했다.

정병진 편집위원

■박정희에 訪北고백했던 임석진씨

56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하고 서독으로 유학,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자연과학대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노동문제를 다룬 학위논문(헤겔의 노동의 개념)이 서독 TV에 방영되면서 나의 이름이 제법 알려져 있었다. 당시 유럽의 유학생들에게 북풍(北風)은 하나의 대세였다. 남한은 썩을대로 썩었고, 4·19와 5·16으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나 역시 많은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높았다. 민족적 공산주의자였다고 할까.

김일성대학 총장이나 노동당 정치국원 등이 동베를린에 오면 만나자고 연락이 오곤 했다. 그들을 만나 식사도 하고 얘기도 나누었다. 59년 말 북한 민족청년위원장이라는 오모씨가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동쪽끼리 못 만날 이유가 뭐냐'는 요지였다. 만났다. 이후 (북쪽)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잦았고 더러 만났다.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가끔 식사나 하라며 달러를 건네주었다. 월북자 이야기를 하던 중 그들이 평양 방문을 제의했다. 몇몇 유학생이 평양에 가서 친지들을 만났음을 전해 듣고 있던 터였다. 나는 북한에 친지는 없었지만 친형처럼 여기던 윤모씨가 생각났다. 그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와 조선은행에 다니다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61년 9월 모스크바를 경유해 평양에 갔다. 어느날 저녁 조선중앙은행에 근무한다는 윤씨 집으로 안내됐다. 대동강 옆 아파트였다. 성대한 밥상을 차려 놓았더라. 윤씨는 자신의 집 바로 위층에 김일 제1부수상의 아들이 있다며 스스로 최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음을 과시했다. 3주일 동안 머무르며 적지않은 북한의 고위층 인사들과 면담을 했다. 그들은 노동당 입당을 권하며 당 정치국에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자 고민이 시작됐다. 평양에 3주 동안 머무르면서 이전에 갖고 있던 북한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어졌다. 도시 곳곳에서 강압과 폭력성을 느낄 수 있었다. 3주 동안 북한의 '장막 뒷 모습'을 보게 된 것이었다. 북측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였다. 63년 3월 쾰른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던 현재의 부인과 결혼했다. 이후 북측 사람들과의 만남이 고민과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장남이어서 부모님도 염려되고, 서울에 교수 자리도 생겨 66년 귀국을 결심했다. 당시 유학생 사이에는 '북한 접촉'이 문제가 될 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나의 귀국 사실이 알려졌는지 가끔 만나던 북쪽 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다시 한번 평양을 방문할 것을 요구했다. 시간이 없다고 하자 "귀국 허락은 나의 소관 밖이다. 평양에 들러 고위층의 허락을 받아라"고 했다. 6월 다시 평양에 갔다. 이효순 노동당 부위원장(대남사업총국장)이 나를 담당했다. 혁명박물관 등을 구경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밤새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는 '남쪽에 있는 공작원들로부터 매일 보고를 받는다. 남쪽에는 50대 노파들도 화려한 마후라를 두르고 다닌다는데…, 벌써 이렇게 서로 달라졌으니 어떻게 통일이 되겠는가'라는 이야기도 했다. 거듭 나에게 입당을 요구했다. "당신은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며 위협도 했다. 더 버티다간 억류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윤씨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하자는 대로 하겠다. 서울에 돌아가지도 않겠다"고 약속하고 5일만에 서독으로 왔다. 며칠 후 가까운 친구 한명에게만 알리고 보따리를 쌌다. 이효순 앞으로 편지를 써서 그에게 동베를린 대사관에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부득이 귀국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당시 중정 기록에 나는 '북에서 탈출한 사람'으로 돼 있었다.

서울대와 외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를 맡았다. 고민과 불안으로 나날을 보냈다. 특히 '남한에 퍼져있는 공작원들로부터 매일 보고를 받는다'는 이효순의 말이 생생했다. '북한을 배반했다'는 마음으로 불안감이 컸다. 밤길도 무섭고, 가족도 걱정스러웠다. 당시 유럽에 유학했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처럼 '김형욱과 김일성 사이'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무렵 라디오를 듣다 깜짝 놀랐다. 튀빙겐대학에 유학하며 모 신문 특파원으로 일하던 이기양씨가 체코 프라하에서 실종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의 절친한 대학친구(서울대 정치학과 졸업)로 나의 소개로 유학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북한에 납치됐다는 것을 직감했다(지금까지도 그의 소식을 모른다). 적개심과 분노, 놀라움과 공포로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대통령에게 이 같은 사실을 직접 털어놓으면 나는 물론 나처럼 '함정의 틈바구니'에 끼어버린 사람들 모두가 살 수 있는 방안이 있을 것 같았다. 가깝게 지내던 은행원 모씨가 생각났다. 그는 박 대통령의 인척이어서 청와대를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다. 그를 찾아갔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깜짝 놀라더니 '박정희 대통령이나 김종필 공화당의장, 김형욱 정보부장 중 한명과 연결해 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외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전화 연락이 왔다. 오후 2시반쯤 은행으로 갔더니 짚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과 3시에 약속이 됐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마음 고생이 많겠다"며 악수를 건넸다. 이어 "대강 이야기 들었다. 사회적 입지에 곤란이 없도록 할 테니 기탄없이 말하라"고 했다. 셋이 앉아 2시간 남짓 이야기했다. 대통령은 중간에 육군참모총장을 만난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것 외에는 나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 "무슨 비행기를 타고 어떻게 평양에 갔느냐"고 묻기도 했으며, 특히 이효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내가 헤겔 철학을 전공하며 노동문제 관련 논문을 썼다는 말을 듣고는 "북이 임 선생에게 흥미를 느낄 만도 했겠군"이라고도 했다. 나는 "유학생들은 일시적 혈기로, 혹은 이념 공부를 하다보니 관여하게 됐다. 한번 관여하면 빠져 나올 수 없다. 대책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박 대통령은 일어서면서 "지금까지 말한 것을 글로 써서 보내달라.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정보부장에게서 연락이 갈 것이다"고 말했다.

며칠 뒤 중정에서 집으로 짚차를 보냈다. 한 달여 조사를 받았다. 조사기간 내내 집까지 출퇴근을 시켜주었다. 일부 수사관은 "당신은 대통령이 뒤에 있으니…"하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당시 나의 진술은 상당 부분 과장되어 발표됐으나 항거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나 때문에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유학하던 동생(임석훈·林錫勳·당시 32세)도 잡혀와 조사를 받고 구속, 기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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