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에서 연기란 자칫 화려한 케이크 위에 얹힌 여러 장식 중의 하나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석훈에게 영화 '튜브'는 그렇게 소모적인 영화이지만은 않을 듯하다.말쑥한 얼굴에 서글서글한 미소의 김석훈. 낡은 가죽 점퍼 차림에 범죄자라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의 장형사로 변한 것이 어색하지 않다. 영화에서 그의 첫 대사는 "나도 그게 궁금해. 내가 뭐 하는 놈인지 말야."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게 '순둥이' 이미지만은 아님이 증명된다.
정작 자신의 연기에 대해 불만이 많다. "연기력이 돋보이는 영화는 아니지요. 이 영화의 부제라면 아마 '지하철 7103호의 하루'가 아닐까요. 하지만 액션이든, 멜로든 지지부진하지 않고 딱 떨어지는 부분이 마음에 들어요."
'튜브'에서 그의 액션 연기는 그냥 '시늉'이 아니다. 달리는 지하철 바닥을 통해 다음 칸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찍기위해 지하철 세트에 매달린 채 하루 종일 촬영했다. "대체 이 장면을 어떻게 찍을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는데, 역시 해보니까 장난이 아니더군요." 비록 차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양팔과 다리로 체중을 견디며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폭탄이 설치된 지하철에 타기 위해 오토바이를 몰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도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운 후 직접 연기했다. "무술 감독이 계단에 패널을 깔아 주었는데, 그게 더 무섭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계단으로 타고 내려갔지요. 평소 운동을 즐겼던 터라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어요."
드라마 '홍길동'으로 데뷔, '단적비연수' 등 주로 몸을 쓰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에게서는 땀냄새보다는 '먹물'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편이다. "액션보다는 휴머니티가 강한 영화에 끌려요. '집으로'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같은 영화 말이죠. 아직은 영화를 배우는 입장이지만 나중엔 제 취향의 영화를 해 보고 싶어요." 8월 개봉할 '귀여워'(감독 김수현)에서는 퀵서비스맨으로 또 한차례 대대적 이미지 변신에 나선다.
영화 출연 계약을 마친 것은 2001년 3월. 개봉하기까지 2년3개월이나 걸리는 바람에 마음 고생도 적잖았다. '튜브'는 제작사의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촬영이 늘어졌고, 결정적으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터져 개봉까지 연기됐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사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사고가 커지면서 이러다가 영영 영화를 개봉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고 겁이 났어요."
우여곡절을 거쳐 개봉을 앞둔 지금도 그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촬영 중 허리를 너무 심하게 다뤄 척추 디스크 일부가 다 닳은 상태이기 때문. "앞으로 액션 영화를 하지 못하면 어쩌죠. 속이 많이 상하네요." 선한 표정에 반짝 걱정이 스쳤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백운학 감독
‘쉬리’ 조감독 출신인 백운학(39) 감독은 공고와 하사관을 거쳐 스물 여 섯에 대학에 입학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 주연 배우 김석훈의 대학(중대 연영과) 3년 선배. 제작이 오래 걸렸다.
“2001년 12월 촬영에 들어가 2002년 8월에 제작을 마쳤고 6월5일 개봉되 는 만큼 마음 고생이 심했다. 제작비 75억원을 쏟은 대작이어서 투자자에 게 손해만 안 끼쳤으면 좋겠다. 편집하며 30분 이상을 잘라 고생한 조연들 이 장면이 많이 줄었다.”
공항 시가전과 지하철 장면이 인상적이다.
“공항과 지하철공사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찍으려고 했다. 강력하 게 제작자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처음엔 테헤란로를 빌려 ‘쉬리’ 이상의 것을 찍으려고 했지만 하루밖에 빌릴 수가 없어 애초의 생각을 접었다.”
들어낸 부분 중 아쉬운 것은
“‘아비정전’에서 장궈룽이 추는 맘보 장면처럼 강렬한 장면을 만들고싶었다. 독일에서 강사를 초빙해 찍었는데 생각한 대로 나오지 않았다.”
■튜브 미리보기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으로 개봉이 늦춰졌던 지하철 액션 영화 ‘튜브’는강력한 액션과 속도감 넘치는 영상으로 일단 합격점을 받았다. ‘튜브’는‘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에 견주어도 크게 떨어지지 않을 김포공항 총격전 장면으로 화려하게 문을 연다.
테러범 강기택(박상민)이 꽃다발 속에 숨겨 둔 기관단총으로 순식간에 터미널을 제압하는 장면, 질주하는 자동차가 전복되는 장면 등은 시원한 눈요기 거리. 군더더기 감상을 과감하게 버렸다는 점에서 실패한 이전의 블록버스터와 궤를 달리한다.
전직 국가정보부 요원이 지하철을 탈취, 폭탄을 설치하고 승객을 인질로삼아 정부 요인의 목숨을 요구한다는 내용은 ‘다이 하드’ 시리즈나 ‘스피드’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떠오르게 한다. 브루스 윌리스 같은반골 기질의 형사가 테러범과 대적해 인질 구출에 나선다는 내용도 비슷하다.
장도준(김석훈) 형사는 혈혈 단신으로 지하철에 뛰어들어 테러범 잡기에나선다. 장 형사를 흠모하던 소매치기 송인경(배두나)이 강기택에게 인질로 붙잡히고, 지하철 통제실이 승객이 탄 차량을 포기하면서 강기택의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카메라의 역동성과 지하철 내의 고난도 액션 등의 하드웨어는 돋보이는 반면, 등장 인물들이 관계를 맺어 나가는 소프트웨어는 부실해 보인다. 지하철 수사대 반장 임현식과 중앙통제실장 손병호 등 뛰어난 조연의 앙상블도 그래서 성기게 느껴지는 편이다. 6월5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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