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권 12개국이 연일 계속되는 '달러 약세' 포화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플레 우려 때문에 외환시장 개입을 극도로 자제해 온 유럽은 다음달 달러화 하락으로 악화한 수출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금리를 인하할 것이 확실시된다. 전문가들의 예상치는 최소 0.25%에서 0.5%까지 분분하다.유럽의 금리인하 카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플레 방지라는 고전적 임무에 엄격했던 유럽중앙은행(ECB)이 인플레 심리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금리를 인하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물경제에 대한 우려가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지난달 유로존의 인플레는 전달의 2.4%에 비해 둔화한 2.1%에 그쳤지만 여전히 목표치인 2%대를 웃돌고 있다. 미국의 달러약세 정책은 이 같은 우려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외환보유고가 탄탄한 일본과 금리정책에서 여유로운 유럽이 미국의 달러약세 정책에 맞서 경쟁적으로 인위적 시장개입에 나선다면 세계 경기침체는 더욱 부정적인 방향으로 파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국내 경기침체를 탈피해 보겠다는 미국 당국의 입장은 완고하다. 유로화 대비 달러가치가 역대 최저치에 근접했지만, 오히려 수입물가를 높여 현안으로 대두된 디플레 위기를 해소하는 데 긍정적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같은 상태라면 달러는 올해말 유로당 1.25달러, 내년에는 1.35달러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디플레 방지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 물가하락과 소비심리 위축 등 디플레 위기를 강도높게 경고한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의 발언은 달러약세가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월가의 분석가들은 그린스펀의 발언을 토대로 다음달 24, 25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현 1.25%)가 다시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우려하는 디플레 위기는 어느 정도일까. 전문가들이 보는 미국경제의 디플레 가능성은 가장 비관적으로 보더라도 20% 수준이다. 다소 낙관적인 이 같은 전망에는 1980년대 이후 극심한 장기 디플레에 허덕이고 있는 일본과는 미국 경제체질이 판이하다는 자신감이 작용하고 있다. 그린스펀 의장이 의회 청문회에서 디플레 우려를 경고했지만 대책으로 "쓸 수 있는 실탄이 많이 있다"고 한 것은 이런 시각을 반증하고 있다. 사실상 제로금리 때문에 금리정책에서 손발이 묶여있는 일본과는 달리 아직 금리인하의 여지가 있는데다 약한 달러 외 여러 유사한 통화정책 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금리정책 이외에 FRB가 갖고 있는 유력한 수단 중 하나는 5, 10년물 국채를 직접 매입, 장기금리 인하를 유도하는 방안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린스펀이 디플레를 우려하는 언급만으로도 디플레 견제효과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린스펀의 발언 이후 미국 국채율은 급락한 반면, 주택시장은 수요가 살아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달러약세 등 미국의 디플레 대책이 일본·유럽의 경제회복에 장기적인 부담으로 작용한다면 지금의 경기침체 악순환을 오히려 부추길 염려가 있다는 비관론이 여전하다. 미국 국내적으로도 약한 달러는 증시의 자본이탈과 채권시장의 침체를 불러와 주가하락→자산소득 감소→민간소비 위축→추가 경기침체라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80년대말 엔저를 바탕으로 방만한 통화정책을 편 끝에 부동산 및 주가 폭락이라는 버블경제를 초래한 일본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
■달러약세 엔화강세 궁지몰린 일본경제
미국발 디플레이션 압력에 가장 당황하는 쪽은 일본이다.
일본 소비자물가는 올 1·4분기에 전년 동기대비 3.5% 폭락, 사상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게다가 1분기 경제는 제로 성장에 그쳐 10년 이상 싸워온 디플레가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달러 약세, 즉 엔화 강세는 여기에 기름을 붓는 꼴이다. 그간 내수 부진을 수출로 만회해 온 일본으로서는 엔화 강세가 수출 감소→기업수익성 악화→설비투자 부진으로 이어져 디플레 극복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이에 따라 엔화절상을 막기위해 국제 외환시장에 개입, 달러화를 매수하고 엔화를 매도하는 한편 최근에는 은행의 지불 준비금 목표치를 기존의 22조∼27조엔에서 27조∼30조엔으로 늘리기로 했다. 전통적 디플레 방어 수단인 금리인하는 더 이상 취할 여지가 없어 엔화를 시장에 풀어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일본이 엔고 추세를 저지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 동안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이 동원했던 엔저 정책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취약한 경제에 활력을 주기 위해 달러 약세를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엔에 대한 구두개입을 하더라도 소용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유럽에서도 디플레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의 주요 경제국들은 1분기 일제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특히 유럽경제의 핵인 독일은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불황(Recession) 진입을 확인했다. 독일 통계청은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999년 10월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23일 발표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달러 약세로 인해 유로화 가치는 최근 1년 새 무려 25%나 상승, 유럽 수출기업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결국 오랫동안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정책에 치우쳤던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달 8일 "인플레율(물가상승률)을 2% 아래로 묶는다"는 기존 입장에서 "2% 가까이로 유지하겠다"고 선회했다. 디플레 위험을 감지했다는 신호다. ECB는 또 수출기업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따라 현재 2.5%인 기준금리를 내달 중 내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 디플레이션이란
디플레이션(Deflation)은 만성적으로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 물건 값이 하락하는 현상을 말한다.
생산성이 증대하거나 구조적으로 수요가 부족할 경우 나타난다. 최근의 경우는 수요 부족에 의한 해악적 디플레라고 할 수 있다. 물가가 내림세를 보이면 소비자들은 구매를 연기한다. 이에 따라 경기가 침체하고 물가가 더욱 하락하는 악순환이 계속돼 경제는 장기불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디플레는 인플레이션보다 경제에 대한 악영향이 크며 잡기도 더 힘들다.
디플레 극복을 위한 기본적인 해결책은 통화량을 늘리고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즉 정부나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거나 민간의 소비가 증대되면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정책적으로는 금리 인하와 통화가치 하락 정책, 적자 재정정책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금리가 이미 너무 낮거나 재정적자가 심각한 상황에서는 정책적인 카드가 제한된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각국은 통화가치 조절에 매달리게 되는데 최근 미국의 약한 달러 용인 움직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디플레는 각국의 환율 전쟁을 야기해 세계 경제를 혼란으로 몰고갈 수 있다. 모든 나라가 동시에 자국 통화가치를 낮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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