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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11>보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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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11>보케리니

입력
2003.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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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5월28일 이탈리아 작곡가 루이지 보케리니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작고했다. 향년 62세. 그의 유해는 고향인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루카로 옮겨져 성프란체스코 교회에 안치되었다. 루카가 낳은 가장 유명한 예술가는 '나비부인' '라보엠' '투란도트' 등을 만든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일 터이지만, 보케리니 역시 이 조그만 도시를 예술적 아우라로 치장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보케리니 집안에는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도 보케리니는 성악과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겸했고, 조카 살바토레 비가노는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무용가 겸 안무가였다.바이올린 주자 필리피노 만프레디와 함께 첼로 주자로서 빈, 파리 등 유럽의 주요 수도들로 연주 여행을 하며 본격적인 음악가 생활을 시작한 보케리니는 자신의 전성기를 스페인과 프로이센의 궁정 작곡가로 보냈다. 마드리드와 베를린이 그의 예술적 둥지였던 셈이다. 특히 나중에 정착한 베를린의 궁정에서 보케리니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총애를 받았고, 그래서 1787년 이후 10년간 국왕을 위해서 작곡에 전념했다. 보케리니가 남긴 400여 작품은 대부분 기악곡이고 기악곡 가운데서도 실내악곡이 주축을 이루는데, 이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는 첼로 주자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797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죽자 보케리니는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갔으나, 스페인 궁정의 냉대 속에서 가난하게 죽었다. 19세기 이탈리아 음악계를 휩쓴 오페라 열풍 때문에 보케리니는 사후 한 때 잊혀졌지만, 20세기 들어 다시 조명되면서 '이탈리아의 하이든'으로 불리게 되었다. 보케리니의 기악곡이 고전파의 전형이라는 틀을 하이든의 작품들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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