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1시 서울 강동구 천호2동 461 골목. 폭이 3m나 될까 싶은 좁은 골목길 150m는 마치 숲속처럼 깊고 아늑했다. 열 걸음 정도 간격으로 설치된 12개의 철골 아치 위로 수많은 넝쿨을 뻗은 장미가 수천 송이의 붉은 꽃을 피우고 잎사귀를 펼쳐 초여름의 햇빛을 걸러주었다. 골목 양쪽의 플라스틱 화분 1,000여개도 선분홍빛 꽃을 담아내고 있었다. 꽃과 장미넝쿨 사이에는 눈 내리는 시골풍경, 연꽃그림 등 골목 벽화가 숨듯 자리잡고 있었다. 그 골목길에서 한 아주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산책을 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조무라기 서넛이 재잘거리며 지나갔다. 차량은 물론 진입금지. 더도 덜도 아닌 '장미꽃대궐'이었다."얼마나 좋은지 몰라. 봄엔 꽃 피고 여름엔 골목 깊숙이 그늘이 들거든. 다 장미 때문이야."
2년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다는 이갱우(67)할머니는 골목을 자랑하면서 "요샌 꼭 시골에 사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옆 골목에 사는 한 60대 할아버지는 "마음이 차분하고 머리가 맑아지기 때문에 좀 돌아가더라도 웬만하면 이 골목을 지나게 된다"고 거들었다.
이곳도 원래는 서울의 여느 뒷골목처럼 어지러운 낙서와 쓰레기로 너저분했었다.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마을녹화운동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함께 산에 다니던 주민 5명이 골목길에 화분을 놓기로 했다. 1997년 봄이었다. 그 뒤 철골아치를 세우고 넝쿨장미를 심기 시작했다. 골목에 사는 그림 잘 그리는 피아노 강사가 밑그림을 그리고 주민들이 색을 칠해 골목 벽화가 탄생했다.
이 골목은 이듬해 10월 서울시가 주는 '푸른마을 가꾸기 부문' 대상을 차지했다. 부상으로 받은 200만원으로 골목잔치가 벌어졌고, 뒷풀이는 매년 5월 장미골목 축제로 이어졌다. 21일 열린 올해 장미축제에는 특별히 '노인잔치'란 부제가 붙었다.
골목을 가꾼 것은 주민들의 정성이었다. 처음부터 이 일을 주도한 차진석 장미거리 추진위원회 대표는 "화분 하나, 넝쿨장미 한 그루 해봐야 5,000∼1만원이고 몇 가지를 길에 더 설치하더라도 큰 돈이 든 것은 아니었다"며 "없는 짬을 내 소독과 분갈이를 하고 축제 때면 이틀 밤을 새우며 음식을 준비하는 주민들의 열성이 장미 골목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처음 골목 조성에 쓴 비용은 100여만원. 최 대표가 적지 않은 돈을 내자 뜻 맞는 주민들이 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돈을 보탰다. 주민들은 빈병을 모아 판매한 돈을 장미 소독과 분갈이 등에 사용했다. 올해는 처음 아이디어를 낸 주민 5명이 틈틈이 돈을 모아 축제비용으로 쾌척했고 마장동에서 정육점을 하는 한 주민은 적지 않은 고기를, 동대문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주민은 수건을 내놓았다.
장미를 가꾸면서 골목 주민 80여명의 마음은 저절로 열렸다. 장미가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준 것이다. 이곳에서 자랐다는 이모(34·여)씨는 "골목을 가꾸면서 사람들이 서로 더 잘 알고 더 친해진 것 같다"며 "결혼해 지금은 다른 동네에서 살고 있지만 가끔 친정에 오면 골목 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지내는 것 같아 부러운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주말에 주민들과 장미 손질을 하고 집 옥상에서 삼겹살을 굽는 게 사는 재미"라는 최 대표는 "가장 큰 소득은 주민들이 화합하고 골목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집에서 가꾸는 화분 하나를 봄철에 문밖 골목이나 담장에 내놓는 정성만 있으면 장미골목은 금새 수백개로 늘어날 수 있다"며 "'봄에 화분 하나 골목에 내놓기 운동'을 벌여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김동국기자 d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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