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5시50분 강원 강릉시 포남동 고입 학원가. 앳된 얼굴의 중학생들을 토해내는 학원차량으로 붐비기 시작한다. 중학교 첫 중간고사를 끝낸 해방감에 취할 짬도 없다. 아이들은 10분 뒤 시작하는 수업시간에 쫓겨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편의점으로, 교재 사느라 서점으로 내닫는다. 어디가 목표냐는 물음에 한 여중생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강(릉)여고요." "에걔, 시험도 망쳤다면서…." 친구의 농담 섞인 핀잔에 낯빛이 벌겋게 변했다.오후3시30분 춘천시내 중학교 앞 길은 학원차량과 학부모들의 승용차 대열로 주차장으로 변한다. 교문을 나온 아이들은 한눈 팔 겨를도 없이 '밤 등교'를 위해 차에 올랐다. 원주의 중학교와 학원 밀집지역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고교 비평준화 지역인 세 도시의 아이들은 "공부하기 싫어서" "수행평가가 싫어서" 모두 내심 '뺑뺑이(평준화)'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도 이 날은 "중간고사 덕에 학원이 일찍 끝난다"며 싱글벙글이었다.
올해 3월 원주에서 시작한 고교 평준화 바람이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춘천, 동해, 홍천 등 강원도 전역으로 번지면서 태풍으로 돌변했다. 한 편에서는 평준화를 위한 서명운동, 촛불행진, 천막농성 등 실력행사를 시작했고, 강릉고·여고 원주고·여고 춘천고·여고 동문들은 평준화 반대 연합모임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평준화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자칫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까 조마조마한 모습이다.
"서울대보다 강릉고 입학이 더 힘들어요."
한번도 고교 평준화를 경험하지 못한 곳이 강릉이다. 당시 인구 10만명을 넘지 못해 평준화 대상에서 제외됐었다. 그래서 '명문고' 는 성공인생을 위한 첫 관문이다.
소위 명문고 교복은 급제를 알리는 금의(錦衣)로, 학교 배지는 훈장으로 통하지만 나머지 학교 교복은 죄수복, 배지는 낙인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이의 교복과 배지는 부모의 사회적 지위나 위신을 가늠케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아이가 강릉고나 강릉여고에 진학하지 못해 "이불 뒤집어쓰고 밤새 울었다"는 푸념은 이 지역 학부모들에게는 잊혀진 옛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다.
홀로 남아 돈을 버는 이곳의 '기러기 아빠'는 가족을 외국이 아닌 서울·경기 등 평준화지역으로 보냈다. 강릉여고 출신 학부모 장모(45)씨는 "딸애가 다른 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는데도 가지 않으려고 울고불고했다"며 "차라리 내 졸업장을 아이에게 주고 싶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명문고 진학에 실패한 또 다른 학부모는 "아이가 창피하다며 교복 입는 것조차 싫어하더니 매사에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하소연했다.
'고3병'을 앓기 전 '중3병'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비평준화 체감현실은 더욱 가혹했다. "수행평가 때문에 다른 반 친구한테 체육복 빌려 입는 것도 눈치가 보여요(관동중1)." "대학은 재수라도 할 수 있지만 고입은 자칫 실수해 시험을 망치면 끝장이에요(경포여중2)." 강원 고교평준화 추진위(고평추) 김용배 위원장은 "매년 일부 명문고 진학생을 위해 나머지 학생들은 상처를 입고 있다"고 지적했다.
"평준화는 대세다"
평준화 시대를 12년씩 겪어봤던 원주(1980∼91)와 춘천(1979∼90)의 평준화 주장은 보다 논리적이다.
평준화의 우월성을 증명해주는 성적 분포, 대학 진학률 등 각종 비교통계를 제시했고, 원주는 '73.4% 평준화 찬성'이라는 중3학생 여론조사 결과를 내보이기도 했다. 원주 대성중 김익록(38) 교사는 "평준화 시기에는 학교를 따지지 않고 아이들이 잘 뭉쳤고, 전반적인 성적도 타 지역에 비해 높았다"고 했다.
춘천 고평추 관계자는 "아무 문제 없던 고교 평준화를 비평준화로 바꿔 지역을 둘로 가른 원흉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지역 토호들과 그 장난에 넘어간 노태우 전대통령"이라고 전했다.
학부모들의 평준화 지지 이유는 사교육비 절감과 인성 교육 실현 등 크게 2가지. 춘천 봉의여중 학부모회 이숙(42·여) 회장은 "아이들 과외비 대느라 엄마들이 일당 3만원짜리 잡부도 마다하지 않는다"며 "평준화가 되면 사교육비 부담은 줄지 않겠느냐"고 했다. 원주의 용정순(40·여)씨는 "행동 하나하나를 점수로 매기고 친구를 짓밟아야 이기는 현실에서 무슨 인성 교육이냐"고 반문했다.
한편 평준화와 직접 관련이 없는 동해와 홍천까지 평준화 깃발을 들고 원군으로 나섰다. 그 이면에는 "더 이상 타 지역 비평준화 고교에 지역 인재를 뺏기지 않겠다"는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다.
여전히 혼란스런 학부모들
'비평준화 고수' 맞바람도 거세다.
14일 강원 지역 소위 명문고 출신들이 주축이 돼 지역사랑 바른교육 협의회(지교협)를 꾸렸다. 황남옥(53·강릉고7회) 공동대표는 "무한 경쟁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지역 명문을 살리는 길밖에 없다"며 "고교 평준화는 성적의 하향 평준화를 의미하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중학 내신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개선책으로 용도 폐기된 "고입 연합고사의 발전적 부활"을 천명하기도 했다.
저마다 '올바른 교육'을 외치는 양측을 바라보는 학부모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평준화를 지지하고, 잘하면 비평준화라는 식의 해괴한 이분법도 학부모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강원 도교육청의 잦은 말 바꾸기와 눈치보기도 학부모들의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도교육청은 춘천고 동문회, 도교육감은 춘천고 동문회장"이라는 비아냥과 "박정희 군사정권 이후 소외된 원주의 기를 누르기 위한 음모"라는 식의 막말까지 나돌고 있다.
주민여론에 밀린 도교육청은 일단 평준화 관련 공청회와 여론조사를 각각 8월과 9월 실시키로 합의했다.
"부모 입장에선 내 아이가 가장 큰 관심이죠." 머뭇거리던 이은숙(36·여·원주 봉산동)씨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평준화 취지는 공감하지만 반대쪽에서 주장하는 단점을 철저히 보완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결국 아이들이 고스란히 그 피해를 당할 거고 또 다시 바꾸자고 시끄러울 거고, 그게 걱정이에요."
/강릉·원주·춘천=글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전국 7개市 아직 비평준화 / 道교육청이 평준화 결정
1974년 3월 고교평준화가 시행된 지 올해로 꼭 30년이 됐다. 69년 중학교 무시험제 이후 불거진 과열 입시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평준화는 서울 부산을 시작으로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등 광역시와 인구 10만 명 이상 도 단위 지역 시 등으로 확산됐다.
우여곡절도 겪었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평준화를 도입했던 군산 목포 안동 춘천 원주 익산(구 이리) 천안 등은 90년 들어 비평준화로 돌아갔다. 하지만 2000년 군산과 익산이 평준화를 재도입하고 울산은 새롭게 평준화를 선택했다. 군산 익산 목포는 평준화 제도 '도입→폐지→재도입'을 거듭한 특이한 사례로 남았다.
여기에 지난해 고양 성남 등 경기 7개 도시가 평준화 대열에 합류하고, 올해 1월 목포(71.3%) 여수(68.1%) 순천(77.3%) 등이 주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2005년 평준화를 시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평준화 실시 지역은 모두 23개(2005년 26개) 시로 늘어나 현재 비평준화 지역은 강릉 춘천 원주 포항 안동 천안 공주 등 7개 시만 남아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군 단위를 포함한 평준화 고교 수는 전국 1,999개교의 50.1%인 999개교며, 학생 수는 전체의 67.3%인 120만 8,545명이다. 평준화 도입은 교육부 승인이 필요 없는 도교육청 자체 결정 사항이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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