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갈 때 회원국들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현황을 알아 본 적이 있다. 당시 협정을 맺지 못한 나라가 한국 외에 셋 있었는데 자유무역을 새삼 얘기할 필요가 없는 홍콩, 협정을 맺고 싶어도 중국과의 외교 관계 때문에 쉽지 않은 대만, 또 한 나라는 바로 파푸아뉴기니이다. 자유무역협정을 기준으로 하면 세계 13위의 무역규모를 가진 한국이 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섬나라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국부유출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외국인 투자가 들어와 우리의 산업을 지배하면 중요한 국가의 부(富)가 외국에 유출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 외국인이 우리 공장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도 아니고 땅 덩어리를 옮기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데 말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우리나라의 기업이 영국에 투자한 공장 준공식에 직접 참석하였다. 이 투자로 인하여 영국의 국부가 한국으로 유출된다면 어떻게 영국 여왕이 그 자리에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적대적' 인수합병(M&A)이라는 말도 외국인투자와 관련해 많이 쓰인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외국인의 적대적 M&A가 아예 금지되었으며 그 후 법으로는 허용되었으나, 지금도 실제로는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기업인수나 합병도 거래의 하나인데, 거래를 하면서 우호적으로 하는지, 적대감을 갖고 하는지를 따지는 것은 사리에 안 맞다. 시장에서 콩나물을 살 때 "적대적으로 해요, 우호적으로 해요?" 하고 묻는가. 그보다 훨씬 큰 빌딩을 산다고 해도 이를 따지는가. 그런데 외국인이 기업을 사고자 할 때는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마저 감성적인 색안경을 쓰고 보려고 한다.
물론 우리만 피해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1980년대 일본이 미국의 록펠러센터와 할리우드 영화사를 인수했을 때, 미국에서도 이러다가 일본한테 안방까지 빼앗기지 않는가 하는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세계화의 피해를 걱정하고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은 국제회의가 열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제 무역의 혜택을 우리만큼 받고 있는 나라에서, 우리만큼 외국문화나 외국기업에 경계심을 품는 나라는 찾기 힘들다.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는 서른 나라 중에서 국제투자부문과 외국문화 수용도에서 최하위를 차지하였다.
박찬호의 전성기에 한국 관중이 구름처럼 따라 다녔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어쩌다 박찬호가 강판을 하면 한국 관중도 경기도중에 썰물처럼 빠지는 것이다. 상대팀에 닥터 K로 불리는 유명한 투수가 있든, 홈런 기록을 연일 경신하는 타자가 있든, 마찬가지다. 정말로 보기 힘든 세계적인 선수들의 플레이를 외면하고, 오로지 한국 선수에만 관심을 갖는 한국 관중을 미국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를 못한다. 지난해 우리는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를 이룩하였으며 700만 관중이 거리에 나와 함께 감격을 했다. 그런데 그 감격 속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을 우리 땅에 불러 놓고, 그들의 묘기를 얼마나 감상했는가를 한 번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진정한 세계 속의 한국인인가를 진단해 볼 때다. 강대국의 힘에 눌려 늘 피해를 입는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 또한 우리보다 못한 나라에 대해 지나친 우월감을 가지는 것도 금물이다. 우리나라에 들어 온 외국인 노동자가 50만명이 넘는다. 이들이 귀국할 때 한국은 돈벌이를 위해 고생한 나라가 아니라, 지구촌의 한 식구로서 잘 알고 지내는 나라로 기억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바깥 세상을 모른 채 우물 안에 갇혀 사는 개구리에 비해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는 훨씬 행복하다. 그러나 넓은 바깥 세상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익히고 세상과 조화롭게 사는 지혜를 터득해야 진정으로 그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 정 택 인하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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