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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허영호의 잊지못할 사람 - 힐러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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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허영호의 잊지못할 사람 - 힐러리경

입력
2003.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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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걷는 길을 앞서 간 거장(巨匠)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제겐 단순한 설레임 그 이상이었습니다. 정상에 올랐을 때 밀려오는 벅차고도 감동적인 기쁨 같은…." 에베레스트 등정 2회, 세계 최초로 7대륙 최고봉과 남극·북극점 정복 등 기록의 산 사나이 허영호(48)씨. 그는 타임지가 20세기를 빛낸 20인으로 꼽은 힐러리(83)경과의 만남을 그렇게 표현했다.

허씨의 가슴 속에 평생 잊지 못할 이로 새겨진 힐러리경은 허씨에 앞서 평생을 모험과 도전으로 일관하면서 1953년 5월29일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영웅. 허씨의 설명은 명쾌했다. " 인생으로나 산악인으로나 제겐 늘 큰 산입니다. 산악인으로는 물론이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언의 행동으로 가르쳐준 분이니까요."

허씨에게 힐러리경은 가난하고 헐벗은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삶의 실천자로서 더욱 뭉클한 존재다. 에베레스트의 그림자가 드리운 쿰부지역에는 도로, 다리, 10개가 넘는 병원, 30개가 넘는 학교 등 힐러리경의 자선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다.

"만나기 전까진 그저 산악등반사에 금자탑을 세운 위업자라는 막연한 경외심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를 몇 차례 만나며 마음으로 존경하게 됐습니다." 명강사로 바쁜 허씨가 주위의 어려운 후배들을 돕는 데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는 것도 이런 본받음이리라.

허씨가 힐러리경을 만난 것은 모두 세번. 93년 가을 뉴질랜드의 마운틴쿡 등정을 마친 뒤 힘든 줄도 모르고 그의 뉴질랜드 시골집으로 내달려간 게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몇 차례 편지를 보내놓기는 했지만 워낙 바쁜 명사라 '혹시나'하는 조바심이 일었다. 그런 그를, 힐러리경은 부인과 함께 환히 웃으며 맞이했다. 오랜 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에베레스트 첫 등정의 느낌이 어떻던가요?" "미스터 허가 느꼈던 것과 다를 게 없을 거야."

두 사람은 산 사나이들만의 '무언가'에 빠져 거기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허씨에게 산은 여전히 진행형이었지만 힐러리경에겐 이미 추억이 돼가고 있었다. "힐러리경이 '건강이 좋지않아 좋아하던 알프스도 오르지 못하고 헬기를 타고 정상에 가봤다'며 막 마운틴쿡에서 내려온 저를 그렇게 부러워하더군요." 힐러리경의 소박한 시골집과 신고있던 낡아서 엄지발가락이 삐져나온 구두는 허씨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두 번째는 극적인 조우였다. 97년1월21일, 허씨가 2,800㎞를 걸어 남극점에 도착했을 때였다. 때마침 뉴질랜드 남극기지를 격려차 방문 중이던 힐러리경이 허씨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를 보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연신 'great, great' 하더군요. 반갑게 악수하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재회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1년 전 남미 최고봉 아콩가구아 등정 때 허씨가 힐러리경의 아들을 우연히 만났던 얘기로 둘은 더욱 친근해졌다.

이날 힐러리경은 허씨를 전혀 다른 이유로 감격시켰다. 4년 전 그의 집을 찾아가 선물한 회색 폴라폴리스 점퍼를 입고 있었던 것.

이후 허씨의 가슴 속에 힐러리경은 '에베레스트 첫 등정자'가 아닌 '마음씨 좋고 자상한 인생의 선배' 로 자리잡았다. 두 사람은 그 해 가을 힐러리경이 고상돈씨의 에베레스트 등정 20주년 행사에 참석키 위해 한국일보 초청으로 방한한 것을 계기로 한 번 더 만났다. "1,2차 만남 때 찍은사진을 모두 인화해 선물로 드렸습니다. 아이처럼 얼마나 좋아하던지. 힐러리경이 '우리가 같이 산을 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런 날이 과연 올 수 있을지."

허씨는 힐러리경이 생각나는 5월이면 늘 이런 꿈을 꾼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그와 함께 걷고 있는 꿈을….

/이동국 기자 ea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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