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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샐러리맨의 성공신화 윤윤수 <12> 막막한 화승서의 새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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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샐러리맨의 성공신화 윤윤수 <12> 막막한 화승서의 새출발

입력
2003.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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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무원의 사막 한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순간 느껴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막막함일 것이다. 1980년 내가 화승에 처음 들어갔을 때 심정이 바로 그랬다. 화승에서 나를 수출이사로 영입한 것은 주력 사업인 신발 세일즈를 강화하려는 것이 1차 목표였다. 하지만 당시 한창 떠오르고 있던 종합상사 분야에 진출하기 위한 장기 포석도 깔고 있었다.JC 페니의 경험 덕분에 세일즈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관리자로서 경험이 전무한 내게 종합상사 진출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판매는 물론, 생산, 관리 분야를 모두 꿰뚫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내게 거는 회사의 기대는 너무나 컸다. 종근당 빌딩의 3층 전체를 통째로 빌려 종합상사 역할을 할 화승 서울지사 사무실로 내주고 내게 총 책임을 맡겼다.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는 셈이었다.

중압감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일주일 넘도록 드넓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선 당장 급한 것은 인력 충원이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왜 능력도 없으면서 이런 중책을 덜컥 맡았을까.' 불면의 밤이 계속되면서 급기야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몽유병 초기증세까지 나타났다. 보다 못한 아내가 내 손을 잡고 성당을 찾았다. 나는 원래 종교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심신이 너무 지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자 나는 차곡차곡 한가지씩 일을 시작했다.

처음 심혈을 쏟았던 것은 신발 직수출 문제였다. 회사에서 만든 신발을 일본의 중간상을 거치지 않고 미국에 직수출만 한다면 중간상에 주는 마진이 없어지기 때문에 회사는 그만큼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다. 물론 신발업계에서 오래도록 이어져온 관행을 없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밥줄이 끊어지게 될 일본 중간상들의 저항은 물론, 중간상들로부터 짭짤한 부수입을 챙기던 미국 유통업계 바이어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발업계 메커니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만큼 화승에 처음 들어와 무언가 보여주고 싶었다. 또 당시 세계의 생산기지 역할을 했던 한국 신발업계의 입장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틈을 노리고 있던 차에 마침내 기회가 왔다. JC 페니 본사의 신발 담당 매니저가 새로 바뀌어서 업무 파악을 겸해 한국에 출장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하늘이 준 기회다. 그 사람을 잡아야 한다.' 신발업계―중간상―미 유통업체 바이어로 이어지는 뇌물의 사슬에 익숙하지 않은 그를 타깃으로 삼기로 했다. 예상대로 신임 매니저 리처드 미크가 JC 페니 근무시절 내가 알고 지내던 수많은 중간상들을 거느리고 한국에 왔다. 그가 묵은 곳은 부산 해운대 조선비치 호텔. 하지만 호텔에서 섣부르게 만나다가는 자칫 중간상들과 마주칠 우려가 있었다. 서로 얼굴을 뻔히 알고 있던 중간상들과 마찰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기회를 노리면서 샘플 제작에 열중했다.

샘플 제작은 당시 화승의 방계 회사였던 동양고무 샘플실에서 진행됐다. JC 페니에서 신발 담당을 하면서 미국 바이어들의 입맛을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좋아할 만한 취향으로 100여 개의 샘플을 만들었다.

그러나 단독으로 만날 기회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나는 JC 페니 서울 사무소장 C를 찾아갔다. "중간상을 거치지 않으면 페니도 훨씬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습니다. 더도 말고 딱 30분만 우리 샘플을 보여줄 시간을 주십시오. 중간상이나 바이어를 거치지 말고 리처드 미크에게 직접 말해 약속을 잡아야 합니다."

며칠 후 미크가 한국 담당 바이어 로저 마틴과 함께 화승 부산 사무실로 샘플을 보러 왔다. 일본 중간상들로부터 황제대접을 받던 로저 마틴은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며 항의하는 듯 했다. 미팅이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 샘플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고의적인 꼬투리 잡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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