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해에서 고래잡이가 금지된 것이 1985년 말, 병태가 고래 잡겠다며 설레발을 치던(고래사냥·84년 개봉) 이듬해였다. 그리고 한동안 고래사냥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풀리지 않는 슬픔이나 허전함 뒤에, 포경 금지여부와 상관없이, 주워 섬기던 희망이나 도전 따위의 상투적인 메타포에 불과했다. 하지만 장생포는 달랐다. 고래잡이는 한 세기를 건너게 해준 장생포의 생명줄이었고, 그래서 포경 금지는 마을 소개령에 다름 없었다. 그리고 18년이 흘렀다. 사람들이 떠났고, 장생포도 변했다. 그 황량한 변화에 적응해 남은 이들이 고래와, 고래와 더불어 살던 시절을 그리며 '고래없는 고래 축제(5월30∼6월1일)'를 연다. 주민들은 하지만, 그것이 잃어버린 망향가가 아니라 포경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함성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동네 노래자랑이 세계축제로
95년, 고깃배들이 밀려난 포구를 유화공단이 포위하듯 메워선 지도 오래였던 그 해, 추석날 오후. 울산 남구 장생포동 바닷가 공터에서 조촐한 노래잔치가 열렸다. 트레일러 두 대의 빈 짐칸을 잇대 마련한 간이 무대에서 주민·출향민들은 모처럼 신명을 냈고, '장생포가 낳은 세기의 가수' 윤수일이 심사위원 겸 초대가수로 나서 흥을 돋궜다. 돌이켜 보면, 관에서 본체만체 했던 그 날 행사가 올해로 9회째를 맞는 장생포 고래축제의 첫 회 행사였다.
지자체가 축제를 거든 것은 5회부터다. 올해 축제는 시와 구에서 1억3,000만원을 대고 대기업이 2,000만원을 후원, 남부럽지 않은 규모로 치러진다. 일본 항구도시 시모노세키 시장이 참석하고, 국회의원과 포경·요식업계 대표단 132명이 초대된 국제행사이기도 하다. 첫 회 가요콩쿨을 주관하고, 이후 줄곧 축제 추진위원장을 지낸 최형문(48)씨는 "올해 행사에 약 20만 명의 관광객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고래도시 장생포'로 내보일 만한 건 그다지 많지 않다. 장생포 해양공원에 선 극경(克鯨·귀신고래) 회귀해역 기념탑과 일부 조형물, 몇 남은 고래고깃집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말 이후 러시아―일본 포경업자들을 거쳐, 해방되고 80년대 중반까지도 번성했던 부둣가 고래 해체장들은 대기업 공장들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 그나마 폐허처럼 남은 고사동 해체장 역시 공단 한 켠에 끼어 쉬이 들러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재래 포경장비는 대부분 외지 해양학자나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어, 축제 때마다 빌려와서 전시하는 실정이라고 했다. 뒤늦게 시와 군은 고래박물관(총 예산 28억원 예상)과 폐포경선·해체장을 건설·복원키로 하고, 정부 예산편성을 기다리고 있다. 내달 열리는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울산이 2005년 총회 개최지로 낙점될 전망이어서 그 전에 공사를 마무리한다는 구상이다. 장생포의 마지막 포경선 '진양호'는 항내 유조선과 화물선 틈바구니에 끼어 유령선보다 못한 형상으로 방치돼 있었다.
진짜배기 축제가 무시로 열리던 시절
항구에 고랫배가 들어오면, 장생포는 물론이고 울산 전체가 들썩였다고 했다. 중구 태화동 송종호(62)씨는 "고래 잡아 들어온다는 소문이 들리모 쫄쫄 굶고 안 찾아가나. 고기를 챙기 가지는 몬해도 묵는 기사(것이야) 실컷 얻어묵었다 아이가"라고 했다. 한 마리 40∼50톤씩 나가는 참고래에 치여 4∼5톤 짜리 밍크고래는 고래 축에도 못 들던 60∼70년대, 무선통신 수단이 없어 뱃고동 소리로 어느 배가 얼마만한 고래를 끌고 온다는 것을 가늠하던 시절 얘기다. 고래 해체 과정도 진풍경일 뿐 아니라, 큰칼잡이 작은칼잡이 해체부원들이 칼질하는 짬짜미 '걸렁구리하는(던져주는)' 살코기와 내장에 맛들린 이들은 아예 곁에서 김치에 막걸리 잔치를 벌였다. 최 위원장은 "큰 고래가 들어오면 자전거로 도보로 장생포까지 10㎞ 길을 온 구경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고래 해체와 수출선 선적, 중·도매 작업은 으레 통금을 넘기기 일쑤였고, 당시에는 1급지로 통했던 장생포파출소도 이를 눈감아주던 시절이다. 일제 때는 더했다고 했다. 선장보다 끗발이 좋았다는 고래포수 출신 김해진(76)옹은 "고랫배가 남양해까지 나가던 어릴 적 한 겨울 우리가 삼베 옷 입을 때 고랫배 선원 자식들은 내복까지 챙겨 입었다 아이가"라고 했다. "경찰서장할래 고랫배 탈래 물으모, 열에 아홉은 고랫배 탄다"고 했고, "경주기생 없으모 술도 안마시던 시절"(30년 경력 고래포수 김용필씨·65) 이야기다. 시절이야 오락가락했고, 세월이 가면서 예전만은 못했지만, 소나(수중음파탐지기)에 고속 철제 포경선 20여 척이 만을 누비며 뱃고동이 울리던 85년까지도 그냥 저냥은 했다고 했다.
삶과 맞닿은 고래와의 질긴 인연
한 때 7,000∼8,000명을 넘나들던 장생포 인구는 현재 2,500여 명으로 격감했다. 공장 숲에 둘러싸인 장생포항에는 고기도 없고 잡더라도 먹지도 못하는 형국이지만 어민들은 8∼10톤 통통배로 물질을 한다. 직접 잡지는 못해도 자망이나 통발 그물에 걸리는 혼획(混獲)고래, 떠내려온 난파고래는 검사 지휘를 받아 어민들이 갖는다. 고래고기는 맛을 아는 이들이 별미로 치면서 지금은 없어서 못 파는 실정이고, 축제를 앞둔 요즈음은 값도 오름세다. 울산수협 방어진 위판장 김재수(38) 경매사는 "몸통 자(30.3㎝)당 140만원선 하던 게 요즘은 170만∼180만원씩 나간다"며 "그나마 고래가 없어 경매 소문이 나면 전국 고래꾼들이 몰린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불법 포획도 없진 않다. 밍크고래 한 마리(13자)에 못해도 2,000만원이니, 눈에 띄면 지나치기 힘든 유혹이겠기 때문이다. 울산해경 박인묵 수사계장은 "직원들 눈 뻘건 거 함 보소. 축제 앞두고 며칠 째 집에도 못 가고 검문에 단속입니더"라고 말했다. 수산업법상 불법어로로 적발되면 형사처벌은 접어두더라도 어업면허 1년·면세유혜택 2년 정지에다 수협 대출 일시상환 등 행정처벌이 겹쳐 어민은 사실상 파산이 불가피하다. 어민들은 그래도 "돈도 돈이지만, 어장을 지키려면 고래를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장생포항에서 만난 한 어민은 "고래가 근처에 얼쩡대모 고등어고 갈치고 다 내빼삐고, 고기가 없어요. 고래 지키자고 어민 직이는 거 이기 옳다 말이요?"라고 항변했다. "길거리 판떼기장사(노점)는 하게 돼 있소? 부산 다대포서 전남 목포까지 고데구리(소형기선저인망·불법) 천진데 그거는 와 안잡소." "그래도 좀 기다리모 포경 허가가 날 수도 있다더마." 그들에게 고래는, 예나 지금이나 삶과 맞닿아 있었다.
/장생포=글·사진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해양수산부 국립수산과학원은, 장생포 일대 역전의 포수들과 함께, 99년 이후 5년째 연안 고래 분포도 조사를 벌이고 있다. 학술연구 차원이면서, 제한적이나마 포경 쿼터를 얻어보자는 계산도 있다. IWC에 운이라도 떼보려면 과학적인 데이터를 들이대야 하기 때문이다. 고래의 연안어업 피해에 대한 연구도 세계식량농업기구(FAO) 수산위원회의 연구과제로 진행중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장생포는 포경 재개 기대감에 조금씩 부풀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는 이른 듯했다. 국립수산과학원 김장근(46) 박사는 "고래의 이동수역이 세계 대양, 좁게는 북태평양 전역에 이르기 때문에 분포 모니터링도 10∼20년씩 걸리는 거대 프로젝트"라며 "데이터를 들고 협의를 하더라도 쿼터가 날 지, 나면 언제 날 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역시 고래 전문가는 아니다. 국내 전문가는 사실상 전무한 실정. 그래서 갈 길은 먼데, 연구인력과 예산은 늘 부족한 실정이라고 했다.
그래도 고래축제유치위원회는, 고래를 다시 잡을 수 있게 되면 한창때 해체장 주변에서 무시로 열렸던 잔치와 같은 그런 고래축제를 꿈꾸고 있다. 장생포(長生浦)는 오래 정 붙여 사는 포구라는 의미다. 사람도, 고래도 그렇다는 말이다.
/최윤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