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일로 3년간 머물렀던 미국의 워싱턴을 남편은 ‘천국 같은 지옥’이라고 불렀다. 서울에 비해 청정하기만 한 공기, 공원속에 집이 드문드문 들어앉은 것 같은 주택가, 탁 트인 고속도로에 주차 걱정없는 넓은 땅….처음엔 그렇게 천국같던 곳이 지옥처럼 느껴진 것은 아마도 한국남자들 특유의 진한 밤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리라. 대리운전이라는 게 없으니 마음놓고 술한잔 마실 수가 있나, 룸살롱이 있길 한가. 남편은 미국 생활 내내 ‘지옥 같은 천국’ 서울을 그리워했다.
난데없이 이 천국, 지옥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전두환 전대통령이 중1짜리 우리 둘째보다도 가난뱅이임을 알고 나서였다. 서울시내 한복판의 수백평 짜리 저택에다 호화판 해외여행, 아내와 동반골프를 즐기는 양반의 통장 잔고가 단돈 29만1,000원이라니 그는 ‘부자 같은 거지’일까, ‘거지 같은 부자’일까.
그런데 이번에는 이 가난뱅이 전직 대통령의 자녀는 물론, 손자 손녀들까지 알토란같은 땅부자임이 밝혀졌단다. 드러난 것만 해도 2백50억원이 훌쩍 넘는다는데 정작 그는 ‘생활비를 보태주는 자녀들도 근근이 먹고산다’고 했으니 1억원도 만져보기 힘든 일반 서민들은 굶어죽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일설에 의하면 전두환씨는 노태우씨에 비해 사내다운 기개와 리더십, 꽤 넓직한 오지랖을 지녔다고 한다. 오지랖만 넓은게 아니라 손도 커서 한창 시절 그가 밑에 사람들한테 집어준 봉투는 보통 몇천만원 단위였다는 억장 무너지는 얘기도 전해진다.
총칼로 잡은 그의 권력 밑에서 숨통 막혀 했던 기억이 생생하건만 그래도 보통 할아버지처럼 늙어가는 모습에 조금씩은 연민을 느껴왔다. 그런데 군인중의 군인이라는 그는 그 연민 조차 참을 수 없나보다. 이런 식으로 우리를 또다시 우롱하는 걸 보면….
부자인지 거지인지 알쏭달쏭한 전직 대통령 때문에 역겨워진 마음을 토닥거려준 것은 ‘꼭 100원만’ 구걸한다는 고려대앞 지하보도의 거지 ‘원만이 아저씨’ 이야기였다. 500원을 주면 반드시 400원을 거슬러 준다는 그가 전두환씨보다 더 부자로 느껴진 것은 작은 원칙이라도 지켜나가려는 자존심 때문이 아닐까.
천국과 지옥은 내 마음속에 있고, 부자와 거지의 차이는 떳떳한 마음에 있다. ‘부자 같은 거지’ 전직 대통령을 위해 둘째의 저금통이라도 털어야 할까 보다.
/이덕규·자유기고가 boring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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