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우먼 김미화(金美花·39)씨가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1983년 MBC 라디오 개그 콘테스트에 입상해 개그계에 첫 발을 디딘 그는 출세작인 '쓰리랑 부부'의 숯검댕이 일(一)자 눈썹 순악질 여사를 비롯해 '삼순이 부르스'의 청소부 아줌마 등을 통해 따뜻한 웃음을 선사해 왔다. 뚝심으로 버틴 무명 시절, 꿈처럼 찾아 든 성공,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 등 김씨가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며 쓴 수기를 5회에 나눠 싣는다.
세월 도둑이란 게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도 모르는 새 20년 세월이 후딱 지나 불혹의 나이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가 말이다. 아직도 마음은 개그맨 시험 수험표를 달고 방송국 복도를 서성이며 "꼭 붙어야지, 붙을 거야"를 수없이 되뇌던 열 아홉 그 시절인데, 어느덧 그런 신인들을 뽑는 자리에 내가 앉아있다.
나는 대여섯 살 무렵부터 동네 사람들 앞에서 배삼룡, 서영춘 선생님의 흉내를 내며 코미디언의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읜 뒤 그 꿈은 더욱 단단해졌다. 남들을 웃기며 '아버지 없는 아이'란 놀림을 이겨냈다. 철 들고는 맏딸로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기 위해 꼭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고교(서울 신경여상) 졸업 후 관광회사 경리로 6개월쯤 일하다가 MBC 라디오 개그 콘테스트에 입상했고, 이듬해 KBS 개그맨 공채 2기로 TV에 진출했다. 그러나 성공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얼굴이 안 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방송국 계단에 쭈그려 앉아 연습에 연습만 거듭했던가. 출연 초창기에는 너무 욕심을 내는 바람에 '오버 액션'을 심하게 해 못 봐줄 정도였다. 이름을 빨리 기억시키려고 딴에는 잔머리를 굴려 "슛!"과 동시에 내 이름을 서너 번 반복해 말했다가 "이 방송국이 다 니꺼냐"고 PD에게 혼쭐나기도 했다. '유행어를 만들면 뜰까' 해서 밤새도록 머리를 쥐어짰지만 밤에 쓴 연애편지를 아침에 읽었을 때의 느낌처럼, 아침에 다시 들여다본 아이디어 노트의 단어들은 유치찬란하기만 했다.
여자는 남자 옆에서 예쁜 꽃처럼 헤벌쭉 웃고만 있으면 OK인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름만 '아름다운 꽃'일 뿐 얼굴이 받쳐주지 않아 꽃이 되지 못했다. 딱 이주일 선배님의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란 유행어 같은 심정이었고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동기들은 전부 배역을 맡았는데 나는 2년이 넘도록 배역이 없었다. 써주질 않으니 출연료도 없었다. 항상 배가 고팠다. 이상하게 돈이 없으면 더 배가 고팠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집에서, 남이 안볼 때 혼자서. 눈치가 보여도 밥 때가 되면 악착같이 동료들에게 따라붙어 밥을 얻어먹곤 했다. 속으로 나는 꼭 잘 될 거라고, 잘 되면 배로 갚으리라 다짐하면서. 고마운 동기 김한국 임미숙 이경애…. 이들이 없었으면 그 당시 나는 어떻게 먹고 살았을지 모른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일도 없이 방송국을 오가는 건 고역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노래를 흥얼거리며 밟혀도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잡초처럼 살자고 다짐하다가도 이내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참 긴∼ 기다림이었다.
어느 날 코미디언실 선후배들과 함께 와병중인 서영춘 선생님 댁에 병 문안을 갔다. 죽 둘러앉아 인사를 드린 뒤 이경규 선배가 방송 일이 바빠 먼저 일어서자 선생님은 특유의 목소리로 "야 임마, 넌 바빠 죽겠지? 난 살지 못해 죽는다. 뿜빠라 뿜빠 뿜빠빠∼" 하셨다. 우리는 모두 쓰러졌다. 그러다가 나를 보시더니 "어, 너 참 잘하더라"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빛도 그림자도 없던 신인을 눈여겨 봐주신 것만도 감격스러운데, 대여섯 살 때부터 우상으로 섬겨온 분이자 슬랩스틱 코미디의 대가―나중에 연기하면서 터득한 것이지만 넘어지고 자빠지는 연기가 가장 어렵다―인 그 분께 칭찬을 듣게 되다니!
그 때 마음을 굳혔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좋아하는 '우주 소년 아톰'처럼 두 주먹 불끈 쥐고 힘차게 날아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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