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직후 나의 어린 시절은 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고 항상 배가 고팠다. 그래서 한번만이라도 쌀밥에 쇠고기 국을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그런 중에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유일한 간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아래기'였다. 굴뚝이 높은 담포집에서 술을 빚고 남은 찌끼가 바로 아래기다. 암죽 상태의 아래기에 사카린을 타 먹으면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문제는 후유증이었다. 얼굴이 금새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지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등 취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몇 번을 혼나고 술이 그렇게 몸이 좋지않다는 것을 안 뒤로는 나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술찌끼는 먹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토요일 오후쯤으로 기억한다. 그날도 학교에서 돌아와 우리 집의 유일한 간식거리인 아래기를 얻으러 담포집을 찾아갔다. 아래기를 한 통 가득 얻어 지게에 얹으려고 온갖 힘을 다 썼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녀석이 무슨 기력이 있으랴.
그 담포집은 공장과 안채가 연결돼 있었는데, 안채에는 같은 학교 동급생인 여자아이가 안락의자에 앉아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월간지 중 하나인 '학원'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보여 어린 마음에도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아이와 배고픔을 면해보려고 아래기통과 씨름하고 있는 내 초라한 모습이 교차하면서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
바로 그 순간, 나를 위해 천사 같은 분이 나타났다. "저런! 혼자 애쓰는구나." 소녀의 어머니가 안채에서 나오며 말씀하셨다. "그래, 고생이 많구나. 얘야 초년(初年) 고생은 금(金)을 주고 산다더라. 너는 이 다음에 커서 꼭 성공할거다."
지게를 잡아 일으켜주시며 위로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남의 자식을 친자식 대하듯 그렇게. 가난으로 멍든 나의 어린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신 그 소녀의 어머니는 정말 천사 같았다.
"초년 고생은 금을 주고 산다"는 그 분의 한마디는 내 인생의 숱한 고비고비마다 용기와 힘을 주었다. 그 후 나는 고생스러운 일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스스로 말하곤 했다. '이 정도 고생쯤이야 어릴 적 이미 금을 주고 산 내가 아니던가! 나는 이겨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실패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낭패감을 주는 난관과 좌절을 유혹하는 실패조차 담담히 "금을 주고 산 거야"라며 재기의 출발점으로 삼은 패기는 바로 그분의 선물이었다. 사람의 됨됨이를 그릇에 비유한다면 나는 어려운 형편과 고생을 통해 하나님이 쓰시기에 알맞은 튼튼한 그릇으로 빚어진 것이다.
김 광석 (주) 참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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