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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일그러진 근대

입력
2003.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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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지음 푸른역사 발행·1만 3,000원

'19세기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만약 아일랜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국인들은 아일랜드를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와일드의 말처럼 개인은 개인대로, 민족은 민족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고, 그러한 역할을 할 타자가 없을 때는 타자를 만들어 내는 일도 불사할 것이다.'(55쪽) 영국사 전공의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50) 교수가 낸 '일그러진 근대'는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드물게 비교사의 방법론으로 100년 전 근대화 시기의 한국과 일본을 조명한 책이다. 몇몇 학회에서 학술대회를 빌어 비교사 방법론으로 각국의 역사를 살핀 적은 더러 있었다. 하지만 학자 한 사람이 일정한 주제를 갖고 비교사 연구를 진행하고, 결과를 단행본으로 묶어내는 예는 국내에서는 거의 처음이다.

역사학이란 원래 한 나라 안의 특정 주제를 두고 평생을 연구해도 만만치 않은 학문이다. 나라끼리의 역사 비교라는 것은 웬만해선 엄두도 내기 힘들다. 학회 심포지엄에서, 그것도 기껏해야 약 5년 전부터 그런 작업이 간간히 이루어진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하지만 비교사는 어려운 만큼 가치가 남달라 '역사학의 꽃'이라고 부른다.

그 동안 학회 차원에서 '노예제'나 '정치 사상' 등을 주제로 삼아 이루어졌던 거창한 비교사학 작업과 견준다면 박 교수의 책은 좀 왜소해 보일지도 모른다. 비교 연구 대상이 영국 일본 한국이며, 시기도 근대화 전후 수십 년에 한정된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 제국주의 국가가 세력을 넓히면서 아시아를 어떤 사고의 틀로 인식했는가, 또 피지배 국민들은 서양 국가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았는가는 흥미로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특히 영국은 일본의 부강에 심기가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했을까, 또 일본이 영국에 대한 흠모를 아끼지 않다가 어떻게 영국을 딛고 서서 새로운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을까를 밝히는 대목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런 작업은 총체적으로 서양 강국의 아시아 약소국에 대한 타자 만들기와 관련된다.

19세기 후반 영국인들은 한국을 문명 퇴화의 본보기 같은 나라로 여겼다. 한국은 독자 개혁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미개하고 우스꽝스러운 나라' '영원히 클 수 없는 어린아이의 나라'였다. 그래서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 영국인들은 일본의 통치가 한국에 좀더 안정되고 효율적인 행정과 물질적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인식은 달랐다. 일본은 근대화의 열정이 충만한 '백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목도한 후 영국은 예외적인 아시아 나라 일본의 전근대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영국을 제국의 모범으로 삼았던 일본은 자국의 팽창과 식민 통치 방식에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한 영국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침내 1930년대에 '유럽에서 벗어나 아시아로 해내자'며 서양의 근대성을 초월하는 더 높은 차원의 문화적 종합으로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를 갖춘다. 일본 제국주의가 세계를 요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때를 전후해서다.

"한일의 근대화 시기 영국의 아시아 국가에 대한 역사 인식은 분명 제국주의의 식민지 국가에 대한 인식 틀 안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문제를 냉정하게 보지 않고 외부로만 돌려서는 더 나은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일본 식민통치에 가장 비판적이면서 한국에 대해 가장 동정적이었던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조차 "아무런 편견이 없는 관찰자라면 오늘날 한국이 독립을 상실한 것은 대체로 구 왕조의 부패와 취약성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는 책 서문의 한 대목도 그런 점에서 새겨볼 만하다.

저자가 최근 2년 동안 '역사학보' 등 학회지에 발표한 글을 묶은 이 책은 편협한 인식 틀로는 걸러지지 않을 역사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되짚어 본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역사의 의미를 새롭게 길어 올리는 작업이다. 아마도 영원한 '타자'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일반인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쓴 것도 이 책의 큰 미덕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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