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요정책이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정부의 입장이 수시로 번복되면서, 정치·경제·대외정책 등 전분야에서 이익집단끼리 충돌하고 대립하는 사회적 균열 현상이 가중되고 있다.참여 정부는 이익집단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통합적인 청사진을 제시하기 보다는 진보와 보수 진영 사이에서 편들기를 반복하는 반쪽 리더십을 보여왔다. 결과적으로 갈등을 증폭하는 '편가르기' 정책으로 일관했다는 지적이다.
최근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도입을 둘러싼 전교조와 교육부간 갈등은 대표적인 예. 윤덕홍 교육부 장관은 당초 강행방침을 밝혔지만 인권위의 인권침해 지적이 나오자 "인권위 결정에 따르겠다"며 후퇴했다. 그러나 윤 장관은 한달후인 19일 "NEIS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말을 뒤집었고 전교조는 연가투쟁을 선언했다. 노 대통령은 뒤늦게 "연가투쟁시 처벌할 것"이라고 강경대응 방침을 밝혔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한총련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총련 수배해제와 합법화를 내부 추진했던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한총련의 광주 5.18 묘역 시위사건이 터진 직후 "수배해제를 계속 거론하기 어렵다"고 급선회했다. 화물연대 파업은 정부의 현안대처 능력부재와 무책임성의 전형을 보여줬다. 건교부 등은 4월부터 계속된 화물연대의 집회와 면담요구를 무시하다 6일 노 대통령의 질책이 있자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결국 10여일간 극심한 물류대란 끝에 유류세 인상분 100% 보전 등 화물연대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고 사태를 봉합했다.
새만금 사업에서도 부처간 난맥상이 여실히 드러났다. 한명숙 환경부 장관은 새만금 반대 '3보1배' 수행단을 만나 "신구상기획단을 구성하겠다"며 사업 재검토 의사를 밝혔지만 김영진 농림부 장관은 19일 "사업을 예정대로 시행하겠다"고 딴소리를 했다.
대외정책에서도 청와대와 외교안보팀의 행보는 매끄럽지 못하다는 평가다. 당선 이후 북핵의 평화적 해결과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며 대미관계 재정립을 주창했던 노 대통령은 방미 과정에서 '북핵악화시 추가조치'에 합의하고 '정치범 수용소' 발언 등 친미언행으로 굴욕외교 논란을 일으켰다.
경제정책도 예외는 아니다. 재경부는 지난 3월 "조흥은행 매각을 이른 시일내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가 최근 "가격이 안맞으면 1년 이상 걸릴 수 있다"고 한발 물러섰다. 국세청은 룸살롱과 골프장의 접대비 인정 폐지방침을 밝혔지만 김진표 재경부 장관은 2일 "폐지안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뒤집었고 이용섭 국세청장은 "아직 결론이 안났다"고 맞섰다.
금리인하 문제를 놓고 당정간 마찰음도 일었다. 정세균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금리인하는 부동산 투기를 유발할 수 있다"며 노 대통령에게 재검토를 건의했지만 한국은행과 재경부는 13일 금리인하를 강행했다. 결국 청와대와 정부 부처간 불협화음속에 주요 민생현안이 겉돌면서 국민피해와 혼선만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배성규 기자 vega@hk.co.kr
/ 분야별 전문가 진단 /
■김 경 민 한양대 교수 정치외교학과
현 정부의 국정난맥상은 기본적으로 집권세력 주류의 경험 미숙과 노련미 부족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너무 많고 앞서가는 것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개혁이라는 가치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한미관계만 해도 그렇다. '평등한 한-미 관계'의 이상도 좋지만 현재의 한국에서 미국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하고 장기적 과제로 삼아야 했다.
그런데도 현 정부 초반, 너무 그 이상에 집착하는 발언들을 쏟아내 한미관계의 신뢰가 무너졌다. 그 결과 한국의 신용도가 하락해 현재의 경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미국을 방문하고 뒤늦게 현실적인 고려를 한 발언들을 쏟아내니, 이제는 반대로 자신의 지지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됐다. 결국은 모두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지난 4월 19일 '이코노미스트'지의 기사에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면,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대통령은 국정의 기본 방향만 제시해 주고 내각이 그 기능을 다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
대여 관계에서도 대통령은 당권과 대권의 분리원칙을 지켜야 한다. "내 마음이야 뻔하지 않느냐"는 등의 모호한 말로 속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여당이 국정을 제쳐두고 신당논란에만 전념하게 됐다. 야당도 정계개편을 대통령이 주도하는 것으로 의심을 하게 돼 대야 관계도 꼬일 수 밖에 없게 됐다.
■홍 기 현 서울대 교수 경제학부
경제정책의 핵심은 현실에 근거해 기업과 개인 등 경제주체들이 생산적인 활동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지금 핵심을 간과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본질보다는 주변부적인 측면에 집중하게 되고 이것이 현실에서는 정책의 일관성 부재로 나타난다.
최근 금리인하 여부를 둘러싼 한국은행과 재경부의 의견 대립이 단적인 예다. 이는 성장과 분배 가운데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지에 대해 정부 스스로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줬다. 취임을 전후해 재벌개혁을 과도하게 강조한 점이나 경기 활성화를 명분으로 골프를 치는 등 정책 결정과정에서 경제 외적인 측면이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도 문제다.
정부는 경제정책 수립을 위한 기본적인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경제의 국제적인 위치와 발전단계가 어느 수준인지부터 꼼꼼히 따져야 한다. 과하게 말하자면 정치적 측면을 고려해 서구 수준의 복지정책에 매달리지 말아야 하며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제 현안들에 대해 일률적으로 토론문화를 적용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특히 성장과 분배 가운데 현실적으로 어디에 중점을 둘 것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막연히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는 모두 놓칠 수 있다.
또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도 바뀌어야 한다. 정책적 건의와 보좌를 받아야지 스스로 경제대통령이 되는 것에 주력하는 것은 좋지 않다. 결과적으로 경제 외적인 부분이 경제정책을 좌우하는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고 유 환 동국대 교수 북한학과
참여정부의 대미·대북정책 기조가 집권을 전후로 상황과 조건이 바뀌면서 다소 변화를 겪고 있다. 집권 전 대등한 대미관계를 강조하고 대북관계에서도 햇볕정책(대북포용정책)을 계승·발전시키겠다고 했지만 취임 후 현실에 부딪히면서 실용주의적인 접근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외국인 투자 확대와 국내 경기 활성화 등이 어렵다는 현실인식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대미정책에서 대등한 관계 설정보다는 공조강화를 통해 미국에 힘을 실어주면서 북핵 문제의 조기해결을 촉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의 열쇠를 미국이 쥐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한 결과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대등한 한미관계가 요원해진 것처럼 비쳐지고 대북관계에서도 상당한 진통이 불가피해진 점에 대해 정부는 국민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야 한다. 특히 방미 직전에라도 북측이 레드라인을 넘었을 때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내비쳤더라면 국내에서 혼란이 덜했을 것이고, 방미중의 입장 표명에 대해 굴욕외교라는 비난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집권 전에 갖고 있었던 안(案)이 아니라 현실에 근거해 실현가능성을 꼼꼼히 따진 이후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하자면 대미·대북정책의 조정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정부 스스로 실용주의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만큼 또다른 혼란을 초래해서는 안될 것이다.
■김 장 호 숙명여대 교수 경제학과 노사정위 위원
노동계의 집단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비난이 일고 있지만 이는 노사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이어, 노동계의 요구가 폭발하는 '분출 2기'라고 본다.
정부가 친 노조 정책을 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계에서 대통령을 '친 노동자 성향'이라고 판단하고, 여러 집단들이 그 동안 응축된 요구를 분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통령과 청와대가 각 부처에 앞서 모든 문제에 팔을 걷어 부치고 직접 나서려는 모습을 보인 것도 기름을 부었다.
정부는 먼저 모든 문제에 대해 명확한 선을 그어야 한다. 공무원노조의 요구사항을 예로 들면, 공공서비스가 중단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만약 공공서비스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엄정한 법 집행을 통해 불법행위에 대해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명확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 아래 관계부처가 주도적으로 협상을 하게 하고, 부처간 이견이 있을 경우 이를 조율하는 역할은 청와대가 맡아야 한다. 단체행동권과 교섭권의 전면적인 요구에 대해서도 미리 정부의 입장을 정해 그 한계를 명시해야 한다.
또한, 현 정부가 현재의 법 체제 보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우위에 두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한총련 합법화 문제만 해도, 현재 한총련에 대한 대응은 현재의 법 테두리 내에서 해야 한다. 만약 '한총련 합법화'라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현실화하려면, 법을 고치든지 한총련의 변화를 유도한 후 국민적 합의에 바탕해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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