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욕먹을 각오를 해야겠다.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여성들을 자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흘러간 시절을 회고하는 한 개인의 진솔한 고백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여주길 바란다.나는 이따금 한국식 음주문화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국 경제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수출에 모든 것을 걸었던 시절, 외국 바이어들을 한국으로 끌어들이고 계약을 성사시킨 데는 우리의 음주접대 문화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아리따운 여자들이 술을 따라주는 가운데 바이어와 계약이 이뤄지는 한국식 비즈니스 관행.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해도 당시에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전자레인지 수출이 성사된 것도 어쩌면 술자리 비즈니스 때문이었다.
JC 페니 본사에서 보낸 엔지니어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데리고 간 곳은 마포의 단골 룸 살롱이었다. 당시 무역맨으로 한창 물이 올라있던 터라 나는 바이어들을 데리고 거의 매일 룸 살롱을 드나들고 있었다.
동양 남자가 서양 여자에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듯 거꾸로 서양 남자는 동양 여자에 신비감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한국 여인에 푹 빠져 버린 그 친구는 자기도 모르게 폭음을 하고 말았다.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탔던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데다 밤새 술까지 마셔 다음날 스케줄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불문가지. 아침에 호텔로 찾아가자 그는 "오늘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 웬만하면 공장은 내일 가자"고 하소연을 했다.
오후 늦게 술이 깬 그는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술집으로 끌려갔다. 나는 저녁을 사겠다는 핑계로 술집으로 데려가 음주 세례를 퍼부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술독에 빠졌던 그 친구는 다음날 새벽에야 간신히 호텔로 돌아갔다.
당초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더 이상 실사를 미룰 수 없었던 그 친구는 술 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을 선글라스로 간신히 가리고 삼성전자 수원공장으로 실사를 가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치밀하게 꾸미더라도 완벽할 수는 없는 법.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진 윤, 여기가 전자레인지 공장 맞습니까. 왜 표지판에 팬 플랜트라고 되어있죠"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선풍기 공장을 급하게 전자레인지 공장으로 바꾸다가 미처 표지판 교체까지 신경 쓰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단지 안에 선풍기 공장도 있다는 표시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날카로운 질문은 그 한번으로 끝이었다. 계속된 술 자리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 그 친구는 설명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공장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빨리 호텔로 돌아 가기만을 바라는 눈치였다.
결국 사흘 일정으로 실사를 나와 호텔과 술집만 오가다 한나절 잠시 시간을 내 주마간산 격으로 공장을 둘러본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기대대로 '삼성전자의 능력이 충분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이제 기술과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실제로 전자레인지를 만들어 내는 일만 남았다. 수출 주문을 따내는 것은 눈속임으로 가능했지만, 실제로 하자가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눈속임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공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생산과정을 일일이 체크했다. 삼성전자의 저력도 무서웠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불과 6개월 만에 전자레인지 기술을 습득, 처음 계약대로 선적을 이뤄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첫해 수출은 2,500만 달러, 다음 해에는 6,000만 달러로 늘어났다. 한일합섬의 1년 수출 총액이 1억 달러를 넘어 대통령이 수출 탑을 주던 시절이었으니, 전자레인지 하나만으로 올린 실적치고는 엄청난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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