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막내 홍걸(弘傑)씨가 구속되고 차남 홍업(弘業)씨에 대한 수사가 막바지로 치닫던 2002년 5월 말, 송정호(宋正鎬) 법무장관은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의 거친 항의 전화를 받았다.박 실장은 "어떻게 수사를 그런 식으로 하느냐"면서 "석 달 동안 홍업이 주변 사람 400여명을 조사하고 계좌 추적을 했다는데 그렇게 하면 안 걸릴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박 실장은 특히 "YS 시절 현철(賢哲)이가 했던 것과 비교해보라"면서 "홍업이가 현철처럼 인사를 좌지우지 했느냐, 국정을 농단 했느냐"고 따졌다. 송 장관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박 실장은 계속 푸념 섞인 얘기를 했다. 박 실장은 "현철이는 국정의 모든 분야에 관여했고 안기부 보고서까지 별도로 받았다"면서 "홍업이가 만난 사람은 겨우 주변 몇몇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한참 수사의 '가혹함'을 성토한 후 본론을 꺼냈다. 홍걸씨가 구속됐는데 홍업씨까지 구속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이 대목에 와서는 박 실장의 목소리도 누그러졌다. "임기 말 국정을 철저히 챙기겠다며 노심초사하는 연로한 대통령을 생각해보라"는 하소연도 곁들였다.
송 장관도 마음이 무거웠다. 박 실장의 전화도 부담스러웠지만, 송 장관을 진짜 고민하게 만든 것은 평범한 아버지로서 DJ가 자신에게 토로한 고통스런 한마디였다. 박 실장의 항의 전화가 있기 며칠 전, 송 장관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업무 현안을 보고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DJ는 "거 있잖소, 둘째(홍업)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라고 물었다. 송 장관은 목이 콱 막혔다.
막내 홍걸의 구속을 보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참았던 DJ도 홍업씨까지 구속될 지경에 이르자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었다. DJ는 다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고 송 장관은 "수사를 더 해봐야 알겠다"고 원론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DJ는 "당신 아들이 그런 일을 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탄식 섞인 질문을 던졌다. 송 장관은 고개만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DJ가 "그만 가보라"고 말해서야 송 장관은 곤혹스러운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DJ의 탄식이 내내 짓누르는 상황에서 박 실장의 요구는 곧 DJ의 간절한 바람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송 장관은 "수사 결과가 나오면 보자. 미리 뭐라고 얘기하기 어렵다"며 화답을 하지 않았다. 박 실장은 "아래 검사들에게 잘 말하면 안 되느냐"고 거듭 부탁을 했다. 송 장관은 "지금 검찰 분위기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박 실장은 "법무장관이 부하 검사들을 지휘할 수 있도록 돼 있지 않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이 대화는 그로부터 얼마 후 청와대와 검찰, 정치권을 들쑤신 이른바 지휘권 발동 파문으로 이어졌다. 홍업씨 구속(6월21일) 후 개각을 사흘 앞둔 7월 8일, 법무부에서는 "청와대가 '홍업씨 구속을 막아달라'며 지휘권 발동을 요구했다"는 뒷얘기가 흘러나왔다. 또 "송 장관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청와대가 개각 때 조직 장악력 부족을 이유로 송 장관을 교체하려 한다"는 설까지 퍼졌다.
지휘권 발동이란 검찰청법 8조(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에 따라 법무장관이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에게 수사 중단을 명할 수 있는 제도다. 지휘권 발동은 지금까지 한 번도 행사된 적이 없었다.
청와대는 이 얘기를 듣고 경악했다. "임기 말에 그런 요구를 한다고 검찰이 들어주느냐" "법무부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을 놓고 게임을 하자는 것이냐"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사적인 의견 개진, 부탁을 공식적이고 법적인 요구를 한 것으로 변질시키는 의도가 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파문은 급기야 여야가 난타전을 벌이는 정치문제로 비화했지만, 당시에는 워낙 싸울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말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봉합 됐다.
지금 이 파문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의문점을 점검해야 한다. 하나는 박 실장 등 청와대가 검찰청법 제8조의 법적 개념을 정확히 인식하고 지휘권 발동을 요구했느냐 이다. 또 다른 하나는 왜, 그 시점에서 지휘권 발동 요구설이 흘러나왔느냐 이다.
이에 대한 송정호 전 장관의 증언. "박 실장이 지휘권 발동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다. 구속을 막으라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 이 문제를 법무부 간부들과 논의했다. 모두가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여론과 일선 검사들의 분위기도 강경했다. 그 상황에서 구속하지 않으면 검찰은 물론 청와대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증언에 따르면, 박 실장이 법 조항을 토대로 지휘권 발동을 요구한 것은 아니고 선처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송 장관이 압박감과 부담을 느낄 정도로 요청이 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무부가 수용하지 않은 박 실장의 선처 요청을 굳이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 검찰의 독립을 위한 자기 고백이었을까. 당시 청와대는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후보의 대선 승리가 유력하게 전망되고 있었던 점을 들어 "임기 말 권력누수이자, 다음 정권을 향한 또 다른 눈치보기"라는 비평을 했다. 특히 검찰이 홍업씨를 구속하면서 '베란다 장롱 뒤에 돈이 숨겨져 있었다'는 내용까지 공개한 대목에 청와대는 극도의 불쾌감과 분노를 표출했다. 검찰이 의도적으로 홍업씨의 '파렴치한 모습'을 부각시켜 결과적으로 DJ에게까지 모욕을 주었다고 보았다.
정작 당사자인 송 전 장관은 지휘권 발동 파문의 원인을 어이없게도 자존심 문제로 설명했다.
"홍업씨가 구속되고 바로 다음 날(6월22일) 광주에서 월드컵 8강전이 열렸다. 그 때 대통령이 4강 진출을 보면서 우시더라. 그 눈물에 어찌 승리의 기쁨만 담겨 있겠느냐, 아들 구속에 따른 회환과 아픔도 있었겠지. 그것을 보면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경질될 것이라는 얘기가 들렸다. 문제는 아들 구속으로 교체하면 명분이 서지 않으니까 흠집내서 경질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러던 차에 한 신문에 '법무장관, 조직 장악력 미흡으로 교체 검토'라는 기사가 실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언론에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할 때 장악력이 없는 것이지, 할 일을 못한 게 없는데 무슨 장악력 미흡이냐'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지휘권 발동 파문이 제기된 것이다."
계속되는 송 전 장관의 회고. "자리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홍업씨 구속 직전, YS정부의 임기 말에 현철씨가 구속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최상엽(崔相曄) 씨와 거취 문제를 상의했다. 구속 이후 어떻게 처신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최 전 장관은 고통스러운 일이라며 일화를 얘기하더라. 최 전 장관은 현철씨 구속 후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YS가 엄청나게 화를 냈다고 하더라. 최 전 장관이 차근차근 설명했더니 YS는 '알았다, 그만 가라'고 했다고 한다. 하도 서슬이 퍼래서 사표도 내놓지 못했다고 하더라. 그러나 결국 최 전 장관도 몇 달 후 개각 때 경질됐다. 나도 물러날 생각이었다. 다만 명예로운 퇴진을 바랬을 뿐이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이재신(李載侁)씨의 얘기. "언론이 개각 때 이런 저런 기사를 쓴다. 기사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장관이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이런 이유로 경질하면 안되고, 저런 이유로 교체하면 참겠다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다. 부연하면 송 장관은 검찰 수사 내용을 알지도 못했다."
이 파문이 터진 후 사흘 뒤 개각에서 송 장관은 경질됐다. 송 장관은 이임식에서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싸워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줄 수는 없다)'이라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말을 인용했다. "검사는 정도(正道)를 내줘서는 안 된다. 외압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주석까지 달았다.
지휘권 발동 파문과 송 장관의 퇴임을 놓고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지금도 그렇다. DJ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자신을 장관으로 임명한 대통령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라고 비난했고, 반(反) DJ 성향의 사람들은 "권력의 무리한 요구를 거부한 용기있는 처신"이라고 호평했다.
전말을 살펴보면 지휘권 발동 파문은 실제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원인과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 파문은 결과적으로 검찰의 독립에 기여한 측면은 있다. 권력과 검찰 수뇌부 간에 이루어지는 거래나 대화가 더 이상 비밀이 아닐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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