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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살인의 추억"과 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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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살인의 추억"과 1980년대

입력
2003.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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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적 불화가 치유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고향을 묻는 일도 조심스럽다. 누가 고향을 물어 오면 잠깐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이는 10여년 전부터의 습관이다. 잠시 후 "경기 화성입니다" 하면 예상했던 반응이 나온다. "아, 그 연쇄살인사건 났던…" 이번에는 저쪽이 민망한 기색으로 이쪽 눈치를 살피는 형편이 된다.'살인의 추억'을 보러 가기가 두려웠다. '역설'이라지만 제목부터 거부감을 주었다. '10명의 여자가 죽었다. 범인은 잡지 못했다. 사건은 추억이 되었다'는 선전처럼 참혹했던 사건이 이제는 그리운 추억쯤으로 받아 들여지는 걸까. 하긴 당시에 '…지나간 것은 모두 그리워지는 것이리니' 라는 푸쉬킨의 시 '삶'이 유행하기도 했다.

영화는 범죄에 대한 말초적 흥미 대신, 형사들의 인간적 분노와 직업적 집념을 클로즈업 시키고 있었다. 두 형사의 대조적인 수사방식이 관객을 자연스레 영화에 몰입 시켰다. 이 영화는 호평 속에 블록버스터가 되고 있다. 호평과 '대박'을 함께 얻는 것은 영화인들의 꿈이겠지만, 꿈은 대체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근래 그런 영화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정도였다.

리얼리즘 미학이 이 영화를 성공시킨 듯하다. 작은 재미를 최대한 경계하면서, 투박하고 정직하게 진실을 추구한 결과였다. 비록 범인은 잡지 못한 채 시골 형사는 다른 직업을 택하게 되지만, 이 영화는 범인을 잡은 것만큼이나 사람과 영화 자체에 대한 건강한 신뢰를 회복시켜 준다. 불의와 싸우는 집념의 사람들이 있음에 관객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그 동안 조폭 액션이나 섹시 코미디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런 편식현상이 치유되는, 유쾌하고도 진지한 분위기도 감지된다.

현실의 처절함이 예술의 동기가 되지만, 반대로 문학이나 영화가 범죄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최근 30대 벤처회사 직원이 자기 취향에 맞는 여자를 만들겠다며 여중생을 납치, 감금했다. 이 사건이 작가 존 파울즈의 소설 '콜렉터'를 연상 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납치극은 이틀 만에 끝났지만, 어떤 결과로 발전되었을 지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콜렉터'는 나비 수집광인 보잘 것 없는 청년이 어느날 큰 복권에 당첨되면서 발생하는 비극이다. 교외에 저택을 마련한 그는 평소 흠모하던 아름다운 여성 미란다를 납치, 감금한다. 그는 재력과 자신의 흠모가 여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끝내 둘 사이는 가까워지지 않은 채, 미란다는 병이 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이 줄거리에 충실하게 영화 '콜렉터'를 만들었다. 그러나 파울즈의 비범성은 이 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소설에는 영화로 만들어진 이 줄거리 외에 별도의 2부가 있다. 미란다의 시각에서 사건을 해석하는 내용이 2부다. 1부 사건도 충격적이지만, 2부도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왜 이 벼락부자가 된,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이 사내를 결코 사랑할 수 없는가.

비열한 구애에 동의할 수 없었고, 돈이란 삶의 하찮은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파울즈는 1960년대 무교양한 영국 졸부와 궁핍해졌지만 정신적 위엄을 지닌 여인 사이에 흐르는 깊은 강을 보았다. 산업화 이후 대두된 계층적 불화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단절을 날카롭게 투시한 것이다.

'살인의 추억' 역시 약자인 여성에 대한 폭력과 유린, 살인이라는 야만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개인의 폭력 뒤에는 사회의 거대한 무의식적 폭력이 버티고 있다. 마침 지금은 5월이다. 여인 10명의 목숨을 앗아간 1980년대는 어떤 폭력의 시대였던가. 폭력은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훗날 영화로 만들어질 이 시대의 폭력은 무엇일까. 권력인가, 자본인가, 언론인가, 이념인가, 한낱 조폭인가.

박 래 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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