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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이사간 영산포 5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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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이사간 영산포 5일장

입력
2003.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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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에, 지역·대소를 불문하고 연임을 꿈꾸는 단체장이라면 절대 간섭해서는 안될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버스 노선, 쓰레기 매립장, 그리고 시장이다. 잘해야 본전, 자칫하면 차기는 커녕 두고두고 지역사회에서 낯들고 다니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역사라고 해도 좋을 80년의 긴 세월과 그 세월동안 절고 전 갯내를 벗고, 전남 나주 영산포장이 통째 자리를 옮겼다. 개장식을 겸해 새 장이 서던 날(10일), 영산포는 물론이고 인구 10만의 나주시 전체가 들썩였다고 했다. 그리고 평상(平常)의 장으로는 처음인 15일. '영산포 풍물시장'의 장돌림(장꾼)들과 객꾼들은, 시가 목표한 바, 전통과 현대가 동거한 낯선 시설물과 아스콘 바닥에 뿌리를 대느라 막심을 쏟고 있었다.

"갯내가 배야 장이제"

3,000평 부지의 나주시 이창동 새 시장은 봄볕아래 투명했다. 장옥(場屋)은 튼실한 철골조 기둥에 상큼한 차양을 얹었고, 구획을 나눠 앉은 노점도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다. 널찍한 공연마당도 조성됐다. 이른바 재래시장의 현대화다. 지붕에 짚을 얹은 장옥 4동과 쉼터를 겸한 사각정자 3동이 '전통'의 구색을 갖췄다. 볕이 들고 바람이 드니 그야 말로 환골탈태다.

"눈·비 오면 금새 수챗길이고, 여름에는 파리에 구더기가 벅구를 쳤으니 구장(舊場)에 대겄소." 상우회 총무를 맡은 어물전 이영호(48) 씨는, 그래서 좋다고 했다. 어물전 젓갈전 채소전 옷전 할 것 없이 장 전체가 밝았고, 첫 장 마수걸이 푸짐한 상심(商心)을 과시하듯, 흥정도 꽤나 경쾌해보였다. 매상은 몰라도 찾는 이는 구장보다 20∼30% 늘었다는 게 김씨의 어림. 하지만 짧게는 20년, 길게는 40∼50년씩 묵은 장꾼들의 옛 장터와의 정이 쉽사리 끊길까. 생뚱한 표정들이 더 많았다. 어물전 전씨 아주머니는 "장이 옴팡하게 죄이는 게 맛인디, 휑헌 게 베레부럿다"고 했고 "젓전이고 놋전이고 고루 섞여 찡겨야 되는디 다 따로 논께 허전하다"고도 했다.

개장식과 함께 열렸던 지난 10일장에는 속옷 장사들이 재미를 봤다. "새로 옮긴 장에서 빤스 사입으모 사업 풀리고, 부부 금슬 좋다고 모두들 서너장씩 사 입었제.""막장에는 물건이 동나 남자빤스 여자빤스 구분도 없었고, 애기들 빤스를 껴입는 사람도 있었당게."하지만 이 날은 장사 재미도 덜한 듯 했다. 양임순(70) 할머니는 "물건 다 털고 내일은 안 나설라 했더마 아직 마수도 몬하고 있소. 내일 또 남평장 가봐야제"라며 강진서 받아 온 맛조개와 젓게 다라를 밉게 흘겼다.

시장 열린 기념으로 백화점 7만원짜리 끈다리 고급구두를 3만원에 내놓고 '파격세일'에 나선 손경식(74·광주 서구 농성동) 할아버지도 마수걸이를 못했다고 했다. 나주장 영산포장 남평장 다시장을 40년간 누볐다는 그는 새 장터가 어떠시냐고 묻자 "장은 무신 장. 콤콤한 갯내가 바닥에 배서 사방 10리는 퍼져야 그때부터 장"이라고 분질렀다.

갯내만 남은 옛 장터

영산포 5일장은 80년도 더 된, 서남 해안의 대표장이다. 담양에서 발원해 화순 나주의 샛강들을 아우른 영산강이 영산포에 이르러서야 강다운 자태를 갖췄고, 그래서 멀리 해남 목포의 소금배들도 영산포에 배를 부렸다.

강진 해남 완도 장흥 진도 영암의 6개군이 국도 13호선을 잇는 영산포 다리를 넘어야만 대처 바람이라도 쐴 수 있었기에 영산포 장은 경기 성남 모란장의 뒤를 잇는 큰 장으로 통했다. 1981년 영산강 하구에 둑이 서면서 물길이 끊겼다. 산지사방 신작로가 나면서 영산포의 옛 명성이 시들었고, 지금은 외지인들 조차 '소금맞은 배추 꼴'로 치지만 지난 해 영산포역이 폐쇄되기 전만해도 콧대 센 호남선 새마을호가 알아서 서던 곳이다.

장날이면 으레 산지사방 도붓꾼 등짐꾼 봇짐꾼에, 방물장수 황아장수는 물론이고, 풍각쟁이 장타령꾼 야바위꾼까지 총 집결, 북새통을 이루던 영산포장이다. 당연히 마을의 주요 물류나 서비스도 모두 장을 중심으로 모였고, 자가용들이 생기고 신식 마트들이 들어선 뒤부터 눈에 띄게 쇠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장 다웠다고 했다. 불과 열흘 전만해도 그랬다.

하지만, 장꾼이 떠난 빈 장은 참혹했다. 일주일 새 80년 풍상을 한꺼번에 겪은 듯 장옥들은 폭삭 삭아 있었고, 장을 끼고 번성했을 상권도 을씨년스러웠다. 구장 길 건너편에서 40여년 동안 국밥 말고 밀짚모자를 엮어 온 최희열(65·여)씨는 "장날만 되모 허전하고 복장이 터져 더 죽겄어. 평생을 장 봐먹고 살았는디…"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자리에 노인복지회관이 선다요. 안즉도 살 날이 구만린디, 뭔 장시가 되겄고 뭘 먹고 산다요." 아랫동네 사는, 40년 장 구경꾼이자 최씨의 40년 단골인 김유중(77) 할아버지는 40년 습관으로 가게에 나왔지만 술 친구 하나없이 대폿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웃 슈퍼마켓의 박점임(63)씨는 기자가 들어서자 숫제 눈물을 비쳤다. "보상금 한 푼은 커녕 아무 대책도 없이 하루 아침에 요러케 생존권을 박탈하는 벱이 워딨다요." 그는 재고 물건을 하나씩 반품하는 중이라며, 진열된 마실 것 가운데 가장 고급인 듯한, 식이섬유 음료수를 따서 권했다.

전통과 현대의 불안한 동거

시장 이전은 시 입장에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시 관계자는 "간선국도가 노점에 점거 당해 장날마다 기능을 못했고, 시장도 부지가 좁고 낡아 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부득이했다"고 말했다. 세상 추세가 그렇기도 하거니와, 시장의 실상이 그랬다는 것이다.

시는 시장 이전 3개년 사업에 52억원(국비 16억원)을 투입했고, 새 시장이 시장 본래적 기능과 풍물 관광자원 기능까지 해내기를 기대하고 있다. 매달 한 차례씩 공연도 벌이고, 시 부녀단체에서 내방객 차 대접 계획도 추진중이다. 시장 이전사업은 일단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우세해 보였다. 그래도 시가 내세운 '현대와 전통의 동거'는, 어디나 그렇듯이, 쇠락하는 전통에 대한 예우차원의 수사(修辭)인 듯했다. '동거'로 치기에는 새 시장 헌 시장 모두 현대화에 밀렸다는 느낌 때문이다. 영산포 시장의 변화는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전국 5일장의 운명을 짐작케 하는 일인지 모른다.

/나주 영산포=글·사진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영산포

영산포(榮山浦)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왜구 침탈이 기승을 부리던 조선시대, 조정의 '공도(空島·섬을 비우고 피란가는 것)정책'으로 흑산도 주민들이 정착하면서 흑산도의 옛 지명(영산현)을 땄다는 설이 그 하나고, 영산강(榮山江) 나루라고 영산포가 됐다는 설이 두 번째다. 나주시청 윤지향(34·여) 학예연구사는 "영산강의 옛 이름이 영(靈)강이었고 한자도 다르다"며 "영산포 때문에 영산강이 이름을 얻었다는 학설도 있다"고 했다.

영산포가 본격적으로 번성한 것은 일제시대 부터. 호남선 철도(1914년)를 닦고 포구를 키워 수탈한 물자를 본국과 경성으로 실어 나르는 기지였던 것. 호남의 전통적인 치도(治都)였던 나주와 달리 영산포는 계산적으로 성장했고,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포구를 중심으로 요릿집이 불야성을 이뤘다.

영산강 하구언이 선 뒤 영산포의 시절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개발은 멈췄고, 주민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지금의 영산포는 타임캡슐에서 꺼낸 듯한 일제시대 포구의 건물과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동양척식회사의 문서고가 있고, 대지주의 고래등 같은 저택이 있다. 합기도 체육관으로 변한 식산은행 건물이 있고, 함석벽에 판자를 엇댄 정미소와 주조장도 있다. 영산동 주민 최희열(65) 씨는 "세트장 안 만들고도 그 시절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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