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A증권사' 임직원들의 회식자리. 사장이 일어나 건배 제의를 했다. "대우증권을 위하여". 대우증권에 오랫동안 몸담았다 A증권으로 옮긴 대표이사의 입에서 무의식 중에 나온 건배사에 A증권사 직원들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 중 10여명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듯 잔을 들었다. 좌중은 이내 웃음바다로 변했고, 여의도 증권가 구석구석 뿌리내린 대우증권 맨파워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대우증권 출신 증권맨들이 서울 여의도 증권가를 휘어잡고 있다. 대우증권에서 자본시장의 바닥을 몸으로 익혔던 이들이 증권·투신사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애널리스트·펀드매니저·브로커 등 국내 증권업 각 분야에 포진해 있다. 증권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던 80∼90년대, 증권업계 인재 배출의 요람이었던 대우증권은 '증권 사관학교'로 통할 정도다. 수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인정 받는 대우증권맨들은 주요 증권사 핵심 인력으로 활동하며 증권맨의 삶과 꿈, 한국 증권업의 어제와 오늘을 대변한다.
대우증권 출신 현직 증권관련 기관장이나 업체 최고경영자(CEO)만 8명. 오호수 한국증권업협회장(대우증권 전 부사장), 황건호 메리츠증권 사장(전 부사장), 송 종 교보투신운용사장, 강창희 PCA투신운용 투자교육연구소장, 이세근 솔로몬애셋투자자문 사장, 손복조 LG선물 사장, 최 홍 랜드마크투신운용 사장, 진수영 서울투신운용 사장 등이다. 애널리스트의 꽃이라는 리서치센터장도 국내와 외국계 증권사를 합쳐 10명이나 된다.
"증권산업은 무엇보다 사람이 핵심이지요." 대우증권에서 26년간 근무했던 교보투신 송 종 사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대우증권은 인력과 시스템에 많은 투자를 했고, 우리나라 자본시장이 이만큼 성장하는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1983년 당시 국내 최대 증권사였던 삼보증권을 인수해 국내 1위 증권사가 된 대우증권은 1980년대 후반 증시상승 열풍을 타고 국내 대졸 우수 인재를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했고 리서치와 영업 부문에서 선진 자본시장의 기법을 속속 국내 증권업계에 도입했다.
교보투신 송 사장은 매달 격주 목요일과 토요일이면 펀드매니저들과 함께 영등포역 근처 노숙자센터와 고아원으로 달려가 식사를 제공하고 아이들과 뒹굴며 논다. "매일매일 자금운용 실적에 따라 적자생존 원칙이 가장 적나라하게 적용되는 곳이 펀드매니저 세계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여의도 사람들은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을 감싸 안는데 더욱 신경을 써야 하죠."
대우증권 상무와 현대투신·굿모닝투신 사장을 지낸 강창희 PCA투신 투자교육연구소장은 '투자교육 전도사'로 변신했다. '주식투자=패가망신'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투자 교육 없이 증권산업이 발전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다. "우리 투자자들도 많이 변했습니다. 저축과 투자를 구별하고 자산운용과 라이프 플랜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강 소장은 강연을 다닐 때마다 투자를 해야 하는 이유로 '저금리'와 '고령화'를 든다. "오래 살아도 금리가 높으면 저축만 해도 되고, 저금리라도 수명이 짧으면 투자하지 않아도 되지만, 저금리 시대 장생(長生)의 리스크를 줄이려면 이제 투자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금융시장에서는 '설마'하고 생각했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도 늘 반복되고요." 손복조 LG선물 사장(전 대우증권 상무)은 "금융시장 발전을 위해서는 기본에 투철하고 신념과 소신대로 경영하고 실천하는 금융 리더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홍 랜드마크 투신운용 사장(전 대우증권 이사)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을 가장 경계한다. "투자자나 펀드매니저들 모두 조그마한 이익과 유혹에 눈이 멀다 보면 각종 위험을 무시하게 되고 결국 큰 손실을 보게 됩니다."
1988년 말 증시가 한창 뜰 무렵 대우증권 리서치센터가 주식시장이 하락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담은 리포트를 냈다. "회사와 영업점이 발칵 뒤집혔고 보고서는 결국 회수됐죠."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인 임송학 이사는 "그때만 해도 증시가 빠진다고 하면 며칠동안 투자자들로부터 온갖 욕설에 시달렸다"며 "인터넷 등으로 정보가 발달한 요즘 투자자들도 상당히 객관적이고 냉철해졌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지금도 애널리스트를 '점쟁이'로, 증권맨을 '돈 잘버는 사람'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애널'은 시장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 뿐 결코 대박이나 인생역전은 없죠." 우리증권 리서치센터장인 신성호 상무는 " '상식'이 가장 좋은 투자판단"이라고 강조했다. 대우증권·미래애셋증권을 거쳐 한화증권으로 옮긴 이종우 리서치센터장은 "새로운 세계로 나서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지만 자신의 마켓 밸류(시장의 몸값)를 높이는 것은 결국 능력과 실력"이라고 했다.
윤세욱 KGI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지금도 대우맨은 '부지런함'의 대명사"라며 "거의 매일 야근하고 일찍 출근하면 '대우증권 출신은 왜 집에 안가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여의도 증권가의 화려했던 시절과 인내의 시간을 함께 겪은 대우증권맨들. 이들에게 여전히 세계 자본시장이라는 미지의 땅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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