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는 이제 구시대적 유물로 폐기처분된 걸까. 소위 지도층 인사들의 무례(無禮)한 언동이 계속되고 있다. '무례 경연대회'라도 열리는 것 같다. 무례함을 전염시키는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지않나 의심스러울 정도다.양휘부 방송위원의 청와대 발언은 어이가 없다. 그는 지난 10일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환담하는 자리에서 "청와대 주인이 바뀐 것 같아 착잡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특보를 맡았고 한나라당 추천으로 방송위원이 됐는데 지금도 마음이 선거 한 가운데 있는 모양이다.
그는 민주당이 자신의 발언을 문제 삼자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에게 농담도 못하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여당이 뒤늦게 내 말을 문제 삼는 걸 보니 방송 길들이기가 시작된 것 같다"고 한 술 더 떴다.
과거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용기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게 "주인이 바뀐 것 같다"니 무슨 망발인가. 대통령이 아닌 일반 시민에게라도 그런 식으로 말 할 수는 없다. 그는 대통령만 모독한 게 아니라 국민을 모독했다.
지난 3월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공개토론은 '무례경연대회'의 금메달 감이다. 토론이 공개된다는 점과 집단토론이라는 점을 영악하게 계산한 검사들의 무례는 상식을 뛰어 넘었다. 그들은 만용으로 무엇을 얻었나. "검사스럽다" 는 비아냥을 얻었을 뿐이다.
국회의원들이 국정연설을 하러 국회에 온 대통령을 자리에 앉은 채 맞이했던 것도 단연 메달 감이다. 대통령은 서서, 의원들은 앉아서 악수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기립박수로 맞으면 국회의 권위가 떨어지고, 의원의 체통을 구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어제의 동료에게 '대통령 대접'을 하기 싫었던 걸까. 국민의 한 표에 죽고 사는 의원들이 대통령이 얻은 표를 도대체 뭘로 보는 건가.
그런 무례한 국회에서 면 바지 차림으로 의원 선서를 하려던 신참 의원을 거부하는 소동이 벌어진 것은 재미있다. 얼마 전 유시민 의원은 자신의 옷차림을 문제삼는 선배 의원들 때문에 선서를 못하고 다음 날 정장차림으로 나가 선서를 했다. 유 의원은 옷차림도 무례했지만, 첫째 날이나 둘째 날이나 민망해 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TV토론에 나갈 때는 넥타이를 맸던 그가 등원 첫날 넥타이를 풀어버린 것 역시 계산된 무례다.
이 많은 무례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했거나 그의 취임 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노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 자신이 예의 같은 것을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소탈하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사람들을 무례하게 대하거나 무례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자리다. 국민이 뽑아 준 국민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청와대 회의실에서 스스로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사진은 보기 좋았다. 식판을 들고 줄 서 있는 모습도 좋았다. 장관이나 참모들이 대통령 앞에서 담배 피우는 것도 비난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권위주의를 깨려다가 권위까지 깨뜨려서는 안 된다. 대통령도 주변사람들도 대통령의 권위가 훼손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
예의란 귀찮은 절차이고, 고리타분하고, 위선적이고, 불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의란 자신을 존중하기 이전에 남을 존중하고, 나를 앞세우기 전에 남을 앞세우고, 내 이익보다 사회규범을 중시하고, 폭력에 맞서 질서와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의 아름다운 이름이다. 예의란 잘 다림질한 모시옷이나 린넨 냅킨처럼 산뜻하고 우리의 생활을 격조 있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최고의 시대를 살고 있다. 풍요롭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시대를 국민 모두의 땀과 눈물로 이룩했다. 이 최고의 시대에 최악의 무례를 개탄해야 하니 얼마나 기막힌가. 무례는 시대정신과 인간다움을 파괴한다. 무례를 전염시키는 바이러스는 사스 바이러스보다 무섭다. 그런데 우리는 사스만 겁내고 있지 않은가.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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