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학부제 논란이 다시 점화됐다. 최근연세대가 총학생회측에 "2005년부터 광역학부제를 대체할 새로운 학제를 마련하기 위해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약속, 사실상 광역학부제 폐지를 검토하고 나섰기 때문. 그동안 대표적인 '학부제 대학'으로 통했던 연세대가 이 같은 방침을 밝히고 나서자 다른 주요 대학들도 학부제 시행 효과에 대한 검토작업에 나섰다.
빈익빈 부익부
학부제에서 과거로 회귀 조짐은 연세대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한양대 역시 올해부터 인문과학부를 언어문학부 영어문학부 역사철학부 등 3개 단위로 쪼갰고 고려대(서창캠퍼스)는 인문대를 어문계열과 인문사회계열로, 자연과학대를 자연과학부와 공학부로 나누었다.
서울대는 최근 발표한 2004년 모집요강에서 현 인문대와 사회대 사범대 농생대를 중심으로 전형단위를 37개에서 44개로 세분화하는 등 국립대에서도 이전의 과별 체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서울과 지방의 주요 대학들도 최근 이 같은 흐름에 따라 학부제 시행의 문제점 파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분위기에 편승해 상대적으로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국립대를 중심으로 교육부에 연일 '학부제 폐지'를 요구하는 건의문이 날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학부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전공 선택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기초학문이 고사 위기에 빠지고 있다는 것. 서울대 사회대의 경우 10여명이 전공배정에서 탈락, 내년에 04학번 신입생들과 함께 전공선택 재수를 해야 하는 등 경쟁 격화로 학생들 사이에도 불만이 폭발하고 있는 상황. 각 대학 진학상담센터에 전공선택에 실패한 학생들의 문의가 잇따르는가 하면 비인기과의 경우 학생들의 수업 충실도가 현저히 낮아지는 등 부작용도 양산되고 있다.
연세대 김모(20)씨는 "1학년 때도 학점 경쟁에 시달려 마치 고등학교를 다니는 기분이었다"며 "2학년에 올라와 전공을 배정 받은 뒤에는 원하는 과에 가지 못한 많은 친구들이 전공 재수를 준비하느라 수업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종교학과 김종서 교수는 "처음 학부제는 이공계 중심으로 대학 자율 차원에서 이뤄졌으나 98년 전공탐색 기간을 설정, 전공선택의 기회를 넓히자는 취지에서 교육인적자원부 주도로 모집단위 광역화가 전면 시행되면서 문제점이 가시화했다"며 "학생들이 전공 선택시 비인기과는 철저히 외면해 학생없는 교수가 양산되고 대학 전공별 소속감도 약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사회 이기주의도 한 몫
하지만 학부제 시행을 권장해 온 교육부측은 대학사회의 이기주의가 학부제 문제점을 키우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대학측이 두뇌한국(BK)21 지원금 등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무리하게 학부제를 광역화한 경우가 많았다"며 "이제 와서 비인기학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다시 학부제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교수 사회의 이기주의가 반영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교육부측은 나름대로 계획을 충실히 세워 학부제를 시행하고 있는 대학은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성균관대를 포함, 지방국립대인 경북대 전북대 등은 효과적으로 학부제를 운영하고 있는 학교로 꼽히고 있다. 실제 경북대 김기찬 교수는 "갑작스런 광역화를 시도하지 않고 유사학과간의 학부 통합을 서서히 진행하고 있다"며 "기초학문 분야는 학과로, 응용분야는 학부로 통합해 나갈 방침인데 현재로서는 문제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학부제 논란이 재점화되자 학부제를 전문대학원 설립과 함께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김흥주 교육개발원 연구원은 "애초 학부제는 기초교양교육을 필요로 하는 전문대학원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며 "전문대학원 도입과 함께 다시 구체적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박은형기자 voice@hk.co.kr
● 학부제 시행 내년 10년째
대학 학부제는 1995년 탄생, 내년이면 시행 10년째를 맞는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당시 대학측의 적지않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학문 분야를 접할 기회를 주고 전공이 다른 교수 사이의 공동 연구를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로 신입생을 복수의 학과 또는 학부로 모집하도록 고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형식상 시행 여부는 대학 자율에 맡겼지만, 교육부는 학부제 실시 여부를 대학 평가에 반영, 예산 지원에 차등을 두었기 때문에 대학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도입할 수 밖에 없었다.
학부제의 가장 큰 부작용은 학문 편중 현상. 응용 학문인 공대와 경영대는 인문대 사회대 자연대보다 상대적으로 순탄하게 학부제가 정착됐다. 경영학과와 회계학과, 화공과와 공업화학과의 통합 등도 유사학과를 묶어 일단 성공한 사례다. 그러나 자연대 기초학부나, 영문과 불문과 독문과 스페인어과를 통합한 서양어문학부는 이름만 학부라는 지적이 여전하다. 또 대학생들이 적성보다 학과 인기에 따라 전공을 선택, 인기학과에 대한 편중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국·공립대총장협의회는 지난해 6월 "교육부가 학부제를 무리하게 도입하는 바람에 전혀 연관성이 없는 학과들이 하나의 학부로 묶이는 등 많은 부작용이 초래되고 있다"며 개선을 건의한 바 있다.
협의회는 "유사 전공을 통합하는 학부제는 확대돼야 하지만 학부제 선택은 대학 자율에 맡기고 유사성이 없는 전공이 통합돼 있는 학부는 학과군이나 학과로 재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교육부도 이에 대해 "내부적으로 다양한 개선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 외국대학은
미국은 1945년부터 '고등교육의 대중화'에 착수해 현재 대학 2년까지 국가가 교육 기회를 보장해주는 고등교육의 의무화를 실현한 상태다. 이는 학부제와 대학원 중심의 고등교육 제도를 강화하는 추세로 나타나 현재 미국 대학의 일반적인 교육제도는 학부(school) 혹은 단과대(college)-학과(department) 단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공 사이의 이동이 자유로운 편이다.
캘리포니아 주립대(University of California)의 경우, 최고 수준의 8개 연구중심대학(Research University)과 22개의 일반대학, 다수의 지역전문대학(Community College)으로 구성돼 있으며 예산은 대학수준에 따라 차등지원된다. 60% 이상의 학생이 학비가 싼 일반대학에서 철학 역사 언어 수학 자연과학 등의 기초학문을 배운 뒤 상위권 대학으로 진학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최고 박사과정까지 개설된 실질적인 연구중심대학을 갖고 있는 곳은 미국 전체 대학중 3.5%에 불과하다. 로스쿨 MBA 의대 등 막대한 교육예산이 필요한 전문대학원은 사립대 의존도가 높으며, 기초학문분야는 3분의 2 이상이 연구중심대학에 포함돼 국가가 나서 지원하는 체제다. 즉 연구중심의 박사교육, 실용적 석사교육, 전문인양성 대학교육, 실용적 학사교육, 전문대학 체제로 구분돼 학부제가 대학원 중심체제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일본의 대학은 4년제 학부제(의학 치과의학 수의학 6년)를 중심으로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세 분야에 걸친 일반교양과 전문 기초교육과정으로 구성된다. 전공 비중이 높아 졸업 필요 단위수에서 차지하는 전문과목의 비율이 60∼65%정도에 이른다. 학부제 도입에 10여년이 걸린 도쿄(東京)대의 경우 현재 교양 법학 공학 문학 이학 농학 경제 교육 약학부로 나뉘어져 있다.
성균관대 이한구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전문대학원제 설치와 심도있는 교과과정 개편작업이 부실한 상황에서 학부제가 시행돼 많은 부작용이 나타났다"며 "다양성을 바탕으로 각 대학에 맞는 보완책들을 찾아나가되 글로벌 스탠더드에 뒤지지 않는 경쟁력있는 한국형 학부제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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