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19일 전남대 여학생 박승희가 20일간의 병상 생활 끝에 작고했다. 20세였다. 박승희는 그 해 4월29일 전남대 교정에서 열린 '고(故)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 대회'에 참석해 반미 구호를 외치며 제 몸을 불살랐다. 강경대는 그보다 사흘 전 반정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서울 명지대 학생이다. 박승희가 죽은 날은, 우연이겠지만, 강경대의 유해가 광주에 도착한 날이었다. 두 동갑내기는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묻혔다.박승희는 전남 목포 출신으로, 죽기 한 해 전 전남대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해 교지 '용봉'의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분신과 죽음 사이의 20일이 그에겐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을 터인데, 그 동안에도 몸 상태가 좀 나아진다 싶으면 손가락으로 '노 정권 타도, 미국놈들 몰아내자'라는 표현을 힘겹게 쓰기도 했다고 전한다. 스물의 나이에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미국에 대한 격렬한 미움을 접지 않았던 한 여성을 떠올리면, 기자는 숙연해지기에 앞서 씁쓸해진다. 그러나 박승희는 단지 비틀린 한국 현대사의 희생자였던 것만이 아니라, 그 비틀림을 펼쳐보려고 능동성을 극대화했던 시대 정신의 한 주체이기도 했다. 설령 그의 실천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죽음 앞에서 삼가는 마음을 가져야 옳으리라. 최근 몇 해 사이에 미국은, 12년 전 오늘 죽은 한 한국 여성이 이 나라에 대해 지녔던 미움을 점점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5월이 정치적 죽음의 계절이 된 것은 1980년 이후다. 박승희가 죽은 직후에 맞은 1991년 5월이 특히 그랬다. 아홉 사람의 학생·노동자가 그 해 5월에 분신하거나 투신하거나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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