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5월17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흑인 민권 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판결을 내렸다. 린다 브라운이라는 흑인 소녀의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이 캔자스주(州)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얼 워렌 대법원장은 유색인과 백인에게 별개의 교육 시설을 제공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흔히 '브라운 대(對)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소송의 판결은,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인종들에 대한 '평등하되 분리된' 교육 시설의 제공을 지지함으로써 흑인과 백인의 분리를 합법화한 반 세기 이전의 대법원 판결을 뒤집은 것이었다.워렌 대법원장은 이 판결을 통해 그 때까지 백인 학교와 흑인 학교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던 남부의 주들에 대해서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인종별 학교들을 통합하라고 명령했지만, 흔히 딥사우스(Deep South)라고 불리는 최남부(最南部) 주들에서는 여전히 백인 학교와 흑인 학교를 따로 운영했다. 아칸소주 리틀록의 한 고등학교에서 등교하려는 흑인 학생들과 이를 막는 학교 당국, 백인 학생·주민들 사이에 소요가 일어나 연방군이 파견된 1957년까지 세 해 동안, 남부 지역의 3,000여 개 백인 학교 가운데 684개 학교만이 인종 분리제도를 폐지했다.
그러나 브라운 소송이 교육 시설을 포함한 공공 시설의 사용에서 인종 사이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물론 미국에서의 흑인 인권 향상이 법을 통해 이뤄진 것은 아니다. 법원이나 의회는 단지 변화한 현실을 추인했을 뿐이다. 흑인들에게 실질적 참정권을 부여한 1964년의 민권법을 비롯해 흑인 인권에 대한 제도적 개선은 테러와 따돌림에 시달리며 민권 운동에 헌신한 흑인 운동가들과 여기 동조한 백인 운동가들의 '힘'을 통해 이뤄졌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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