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현·사카이 나오키 지음 휴머니스트 발행·1만 8,000원
일제 식민지 시대의 기억은 한국과 일본의 만남을 불편하게 한다. 한국은 피해자, 일본은 가해자라는 의식은 양국 민족주의와 맞물려 날카롭게 부딪친다. 여기서 '민족'은 일종의 장벽이다. 그 앞에서는 냉철한 자기 성찰도 전진을 멈추기 일쑤다. 민족의 이름으로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그러한 '경계짓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혹시 우리의 합리적 인식을 왜곡하는 일그러진 거울은 아닐까.
'오만과 편견'은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한국 역사학자인 임지현 한양대 교수와 일본인 사상사 연구자 사카이 나오키 미국 코넬대 교수가 '경계짓기로서의 근대를 넘어서'를 주제로 2001년 8월부터 올 4월까지 서울과 도쿄, 뉴욕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나눈 대담을 정리한 책이다.
두 사람은 민족과 국가라는 근대적 정체성이 어떻게 선을 긋고 경계를 나누면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해 왔는지 추적함으로써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온 국민국가와 민족주의 담론의 억압적 본질을 폭로한다.
임 교수는 근대 유럽 지성사, 사회주의 사상사, 폴란드 근현대사 등을 연구하면서 최근 몇 년간 한국 민족주의에 내장된 폐쇄성과 억압성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글을 써왔다. 가라타니 고진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사카이 교수 또한 민족주의의 일본적 특수성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학자다.
임 교수는 근대적 정체성은 민족·인종·성·국가·계급에 따른 경계짓기를 통해 형성됐으며, 거기에는 차별과 배제가 전제로 깔려있다고 지적한다. 차이는 항상 있었지만, 그것을 차별의 논리로 이데올로기화한 것은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사카이 교수는 그런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19세기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유대인이나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은 백인의 범주에서 제외됐지만 미국 사회의 주류로부터 흑인을 철저히 배제하는 집요한 과정을 통해 백인 집단에 속하게 됐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차별과 배제가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경계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이뤄져 왔음을 상기시킨다. 자유·평등·박애를 내세워 근대적 시민사회의 출발을 알린 프랑스혁명조차 그랬다. 당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 여성작가 올림프 드 구주는 그 선언 때문에 처형됐다.
프랑스혁명은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나누고 여성을 배제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경계가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임을 보여주는 이런 역사적 사례는 차별과 배제에 바탕한 경계짓기의 허구성 내지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한국과 일본의 민족주의 비판이다. 두 사람은 오늘날 한국이든, 일본이든 동아시아에서 작동되는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헤게모니에 기생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헤게모니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당화된 일본의 민족주의는 다시 남북한 각각의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민족주의와 일본 민족주의의 적대적 관계는 미국의 헤게모니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 질서 내부의 하부적 모순일 뿐이며, 미국의 헤게모니는 한국과 일본의 민족주의를 억압하기보다는 고무하고 격려한다는 것이다.
출판사측은 '한일 지성이 벌이는 우정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개념으로 이 책을 기획했다. 대담에 임하는 두 사람의 자세는 각자 쓴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사카이 교수는 '식민주의적인 죄의식을 넘어서', 임 교수는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넘어서' 대담을 진행하고자 했다. 사카이 교수는 구식민지 종주국의 대표와 구식민지 대표의 대담 식으로 흐를 경우, 구식민지 측의 민족주의가 무조건 긍정되고 구식민지 종주국 측은 식민주의적 죄의식을 통해 우월의식을 보존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우려했다.
임 교수는 식민지 시절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습적 희생자 의식'이 일본인에 대해 '집합적 유죄'를 선고할 경우 한일 양국의 민족주의가 서로를 강화하는 '적대적 공범 관계'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는 결코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라, '세습적 희생자 의식'이 비판적 자기 성찰을 가로막는 데 따른 함정을 경계한 것이다. '나는 희생자'라는 자기규정이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떤 행위든 정당하다는 '면죄부'가 돼 우리도 식민주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외국 필자를 국내 기획에 끌어들여 '글로벌 출판'을 시도하는 첫 걸음이다. 일본의 이와나미(岩波) 출판사도 이번 대담의 내용을 재구성해 출판하기로 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