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는 망명한 작가들이 많다. 프랑스를 '제2의 고향'으로 택한 세계적 작가로는 200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중국계 가오싱젠, 알바니아 출신 이스마일카다레, 체코 출신 밀란 쿤데라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공산체제를 거부하고 프랑스에서 자유를 찾았다.그런데 1989년 동구 공산 정권이 붕괴한 뒤에도 이들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 계속 체류하고 있다. 4월 출판된 쿤데라의 소설 '무명(無明)'(원제 L'ignorance)은 고국과 '제2의 고향' 사이에서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 버린 망명자들의 존재론적 갈등을 섬세하고 심도 깊게 보여준다.
밀란 쿤데라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75년 프랑스에 망명했다. 젊은 시절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의 시를 체코어로 번역했고, 그의 초기 소설에서 랭보와 라블레 등 프랑스 작가들을 높이 자리매김한 그는 82년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에게 경애를 표하는 희곡 '자크와 그의 스승'을 불어로 직접 발표하기도 했다. 그 후 '소설의 기술'(86), '배반당한 유언' (93) 등 수필 2권과 소설 '느림'(95), '정체성' (98) 등을 불어로 썼다. '무명'은 불어로 쓴 그의 세 번째 소설이다.
이 소설은 3년 전 스페인어로 선보였고 같은 해 우리나라에서도 '향수'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돼 큰 반향을 얻었다. 그런데 정작 프랑스에서는 27개국어로 번역된 후에야 나왔다. 그의 불어 소설 '정체성'이 프랑스에서 혹평을 받은 때문이라니 망명 작가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던 모양이다. 프랑스 독자들을 오래 기다리게 한 '무명'은 수필적 부분이 여전히 많고 너무 암울하다는 등의 지적으로 기대했던 절찬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몇 주째 베스트셀러 1, 2 위를 달리고 있다.
'무명'은 공산화한 조국에서 견디지 못하고 이국으로 떠나는 이들을 다룬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84)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공산체제가 무너진 이후의 쿤데라의 귀국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프랑스와 덴마크로 각각 망명을 떠났던 두 남녀, 이레나와 조제프는 20년 만에 자유화한 고국의 땅을 밟는다. 이레나는 귀국길 공항에서 우연히 조세프와 마주치는데 그는 프라하 시절 이레나가 이루지 못한 먼 사랑의 꿈으로 남아 있었다. 반면 조제프에게 이레나는 이름조차 기억 안 나는 여인에 불과하다. 이들은 프라하에서 재회, 원초적 체코 속어를 매체로 육체적 만남을 자극해 망명 생활의 망각과 상실을 극복하려 하지만 서로를 모른 채 환멸 속에 헤어진다. 망명의 단절이 쌓은 무지의 장벽에 의해, 고국의 가족과 친구들조차 망명자들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고국에서도 타국에서처럼 낯선 이방인이 돼 버린 망명자들. 그들은 운명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의 고향, 진정한 자아를 찾아 항해를 계속해야 한다.
조 혜 영 재불번역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