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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삼청동 길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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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삼청동 길 나들이

입력
2003.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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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무렵에 유럽 영화제에서 상영중인 영화를 한 편 보러 갔다. 서울 아트 시네마가 있는 소격동 근처는 삼청동 재동을 곁에 두고 있다. 이 도시에서 내가 좋아하는 거리이다.특히 최근에는 화랑이 여럿 들어서고 걸음을 멈추고서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공방도 여럿 생겼으며 규모가 작은 카페며 식당이며 케이크 전문점도 여럿 생겼다. 건물형태나 면면의 변화가 주변과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이렇게 바뀌는 것이라면 마다하지 않겠다 싶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게다가 경복궁이며 박물관이 주변에 있으니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그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어찌 복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사람 볼 일 있으면 삼청동 근처로 약속을 잡는 적이 잦았다. 걸핏하면 약속이 늦어 허둥지둥 거리는 사람이 그쪽으로 약속을 잡으면 먼저 가서 주변을 기웃거리는 여유를 갖기도 했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집 앞에서 일부러 버스를 탔던 것도 영화를 보기 전 오랜만에 그 근처에서 저녁도 먹고 골목들도 걸어 다녀보고 할 심산이었다.

근래에 비가 잦았던 탓일까.

주변이 다른 때보다 훨씬 깨끗하고 정감이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닌데도 성급하게 꽃을 내놓고 있는 넝쿨 장미도 눈에 띄었고, 어느 골목에서는 그때껏 보지 못했던 멋진 한옥을 발견하고서는 닫힌 대문 속의 정경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에 빠지기도 했다. 역시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어느 화랑에 무작정 들어가 옹기 구경도 실컷 했다. 거길 떠날 때 화랑 출입구에 놓인 돌확 속의 물이 너무나 맑아서 옆 사람도 모르게 나뭇잎을 한 장 따서 물위에 띄워놓기도 했다.

과묵한 남자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괴괴한 건물 앞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위를 올려다보기도 했다. 출판사를 했거나 하고 있는 건물인 모양이었는데 폐쇄된 느낌이었다. 괴괴할 뿐 아니라 페인트 칠이 다 벗겨지고 기이하게 높기만 한 건물의 천장 칸마다 낡은 책들이 빼곡이 쌓여 있는 게 바깥에서 다 보였다. 사진기만 있으면 한 장 찍어놓았을 것이다. 늘 지나가면서 상당히 커다란 글씨로 오로지 '밥' 이라고 써진 집의 내부가 궁금했었다.

드디어 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정말 밥집이었다. 뜰에 모종해 놓은 자잘한 꽃들을 내다보며 깨끗한 반찬들과 밥을 잘 먹었다. 어째 그리 밥을 잘 지었는지.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고슬고슬한 밥맛은 외국인도 좋아하는 모양인지 상을 차릴 수 있는 탁자가 몇 안되는 집이었는데도 드문드문 외국인이 앉아 있었다.

이제는 영화를 보려고 영화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누가 아줌마! 그런다. 나는 내가 아줌마라는 걸 자주 잊어버리므로 그냥 가는데 또 아줌마! 그런다. 혹시 나? 돌아다봤더니 아직 소녀티가 나는 처녀 셋이 정독 도서관이 어디냐고 물었다.

정독도서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밀려들던지. 처녀들보다 서너 살 많았을 때 삼청동에 살았다. 그때의 삼청동은 지금에 비할 수 없이 살기가 불편하긴 했지만 또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틈만 나면 정독 도서관에 달려갔는데 언제나 자리가 꽉 차서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입실하는 기쁨,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며 도서관을 내려올 때의 뿌듯함이 처녀들의 질문 한마디에 동시에 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자신 있게 저기…라고 일러주려다가 나는 멈칫했다.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쓰레기가 산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제일의 기품 있는 도서관이랄 수 있는 정독도서관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쓰레기라니. 그 거리 예찬으로 마음이 차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물론 쓰레기도 마땅히 놓일 자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하필 도서관 앞이라니. 우리나라 도서관 처지를 한눈에 보는 것 같았다.

신 경 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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