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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5> 제2차 인혁당 사건 (上)-再建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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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5> 제2차 인혁당 사건 (上)-再建위원회

입력
2003.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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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12일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韓相範)는 기자회견을 갖고 "1974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조직 결성의 기본 증거인 강령, 규약, 조직문서, 감청기록 등도 전혀 없이 라디오, 서적, 학생선언문 따위로 인혁당 재건위원회를 조작해 냈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이어 사건 당시 피의자의 법정진술과 피의자 가족의 체험, 중정 간부 및 수사관의 증언, 교도관의 양심선언 등을 통해 중정 수사과정에서 끔찍하고 참혹한 고문으로 허위 진술이 강요되었으며, 공판 기록조차 의도적으로 조작되고 누락되었음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주범으로 75년 사형된 서도원(徐道源·당시 52세·전 대구매일신문 기자)씨는 민민청(민주민족청년동맹) 위원장을, 함께 사형당한 도예종(都禮鍾·당시 49세·전직 교사)씨는 민민청 간사장을 맡고 있었다. 59년 결성된 민민청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만들었으며, 4·19와 5·16을 거치면서 혁신계 활동을 했다. 5·16 직후 서씨는 혁명재판소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7년을 선고 받았다. 당시 민민청은 교원과 노동자 등을 중심으로 연대를 넓혀가고 있었다. 도씨는 서울로 파견돼 전국적인 조직화·역량화 역할을 했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 재학중인 김중태 현승일 김정강 등 영남출신 학생들과 만났으며, 함께 사회주의 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민민청이 6·3 학생운동과 접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도씨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그룹이 일정 수준의 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창당을 위한 당명이나 강령은 물론, 입당원서나 입당의 자격을 정하는 규칙 등은 전혀 없었다. 통일혁명당이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 79년 사건화 할 당시 상당 수준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과는 달랐다.

인혁당이란 말은 재건위 사건으로 검거돼 중정 조사를 받으면서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심한 고문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자백을 강요했으나 인혁당에 대한 추궁은 없었다. 74년 5월 말 검찰로 넘겨져 조사를 받는데 담당검사가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느냐"고 물어 처음 들었다. 그는 정부 발표문이 실린 신문을 책상 밑 무릎 위에 펴놓고, 읽어가며 질문을 했다. 물론 부인했다. 6월 초 검찰 공소장을 보니 내가 '사회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변해 있었다.

인민혁명당은 62년 1월 남베트남에서 결성된 정당으로 북베트남의 노동당과 형제당 관계를 유지했다. 인민혁명당은 남베트남을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사회변혁을 민족해방의 과제로 삼았다. 당시의 한반도 상황을 분단된 베트남과 비슷하게 인식했던 일부 인사들은 '남한에 필요한 정당은 베트남의 인민혁명당과 같은 형태'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며 당국이 제시한 중요한 근거는 3가지다.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았고, 간첩과 접촉했으며, 북한의 공작금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먼저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는 대목, 이른바 '하재완 노트'다. 75년 사형된 하재완(河在完·당시 42세·양조업)씨가 72년 2∼3월 20일간 집에서 일제 라디오로 김일성대학 강좌 평양방송을 들으며 조선노동당 사업보고문을 적어놓은 노트다. 하씨를 연행한 뒤 수사 당국은 "노트를 매일 한명씩은 보여주었을테니 20명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쳤고, 극심한 고문을 견디다 못한 그는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불렀다. 직후 내가 잡혀 갔는데 "그 노트를 봤느냐 아니냐"가 취조의 전부였다. 물론 나는 그 노트를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만해도 중정은 그 노트가 북한에서 내려온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노트 중간에 다른 사람의 문장이 발견되면서 북에서 온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하씨가 도중에 집을 비우게 돼 선배(송상진·宋相振·75년 사형·당시 46세)가 2일분을 대신 기록했던 것이다(한국전쟁 때 지원 입대해 5년간 육군특무대에서 반공활약을 했던 하씨는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북방송을 청취했다고 진술했다).

다음으로 북한 간첩과의 접촉 여부. 김종길 변호사(사망)는 법정진술에서 "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발표됐을 때 간첩으로 수배된 2명이 있었다. 한 명은 사건이 공개되자 동해에서 미국의 첩보선을 타고 월북했으며, 다른 한 명인 김모는 일본의 친척집으로 밀항 도피했다. 이후 김모는 월북했다가 부산으로 침투했으나 행적을 추적하고 있던 중정에 곧바로 검거돼 67년 처형됐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인혁당 관련자들과 아무런 접촉이 없었음은 그들을 끝까지 추적했던 당국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마지막 북한 공작금 80만원 대목. 당시 마산에 사는 강모씨가 자신의 광산을 160만원에 처분하면서 그 중 80만원을 이수병(李銖秉·75년 사형·당시 36세·학원강사)씨에게 "민주화 사업을 하는데 쓰라"며 주었고, 이씨는 친구인 박진곤(朴震坤·당시 37세·대한목재 사장)씨에게 맡겼다. 박씨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당시 중정은 박씨에게 "80만원을 북에서 받았다고 하면 더 큰 목재소 차릴 수 있게 해주겠다"며 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목재 회계장부에 이수병씨로부터 80만원이 입급된 기록이 발견돼 이 부분도 유야무야 됐다.

나는 고교 때 6·3 사태를 경험했다. 67년 경북대에 입학, 정사회(正思會)란 이념서클에 들어갔다. 정사회는 4·19 직후 학생민통련과 일맥상통했던 맥령(麥領·보릿고개 의미)회가 6·3사태로 해체된 뒤 생긴 학내 서클이었다. 당시 정사회 선배가 학생회장을 하다 군복무후 복학한 여정남(呂正男·75년 사형·당시 31세)이었다. 정사회(여정남 3기, 임구호 5기 회장)는 69년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주도하다 70년 해체돼 이름을 정진회(正進會)로 바꾸었다. 전국대학생 학술대회 등을 열면서 고려대의 한맥회와 서울대의 유인태 이철 장기표 등과 의기투합했다. 73년부터 서울에서 시작된 유신반대 데모는 전국 동시다발 시위로 이어졌고, 73년 12월 5일 조기방학이 발표됐다. 당시 대학 외부조직은 나와 유인태가 맡고, 학내조직은 이철이 맡는 식으로 전국적인 체제를 짜 가는 과정이었다.

서도원 이수병씨 등은 민민청 활동을 하면서 우홍선(禹洪善·75년 사형·당시 45세·한국골드스템프사 상무)씨와 광주의 모씨 부산의 모씨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에 결사반대한다는 취지 아래 '경락(經絡)연구회'라는 서클을 만들었다. 그들은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중·소간 이념논쟁을 연구하며, 평화통일을 위한 토론을 정기적으로 해왔다. 여기에는 4·19 이후 몇몇 혁신계 선배들도 있었고, 후배 대학생들도 있었다. 당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이 멤버들이 대부분이었다.

<임구호(林久鎬·48년생·포항 금산삼계탕 경영)씨는 대구 대륜고와 경북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정화여중에서 1년간 교사를 하다 고려학원에 강사로 있던 중 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징역15년을 선고 받았다. 82년 3월 특사로 석방돼 서도원씨의 딸과 결혼했다. 5년여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87년 대구경북지역 민통련 상임위원을 맡아 6월 항쟁에 간여했다. 한겨레민주당에 들어가 조직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전민련, 국민연합 등에 몸담았다.>

● 74년 제2차 인혁당 사건

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는 총 54명을 기소하면서 배후 세력인 인혁당 관계자 21명을 공소장 맨 앞에 배치했다. 이들의 혐의는 인민혁명당을 재건해 학원에 적화(赤化)기지를 만들고 학생시위를 사주해 국가전복을 꾀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은 4월 3일 밤10시를 기해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이날 낮 민청학련이 주도하는 전국적인 유신 반대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과 관련이 되거나, 그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 혹은 그 구성원과 연락하는 등 일체의 행위를 금하며, 이를 위반한 자는 사형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6월 15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민청학련 사건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비공개로 분리되어 진행됐다. 7월 11일 인혁당 재건위 관련 21명에 대한 선고가 있었다. 7명 사형, 8명 무기징역, 6명 징역20년 이었다. 이어 13일 민청학련 관련 32명(1명 추가 기소)에 대한 선고(7명 사형, 7명 무기징역, 18명 징역20∼15년)가 있었다. 20일 군법회의 관할관인 국방장관은 민청학련 관련 사형이 선고된 7명 중 5명을 무기로 감형했다. 8월 15일 대통령 부인 피격사망 사건이 터지고, 23일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개헌관련 언동 금지)와 4호를 해제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민이 공산주의자들의 흉계를 잘 알게 됐으며, 국민총화가 잘 다져졌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에 계류중인 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75년 2월 12일 실시된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승리로 이끈 박 대통령은 15일 인혁당 관련자와 반공법 위반자를 제외한 긴급조치 관련 구속·수감된 인사 148명을 석방했다.

그러나 석방된 인사들로부터 검거·조사 과정에서의 고문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 조작설이 퍼져나갔다. 또 종교계 재야인사를 중심으로 반정부 활동과 인혁당 관련자 구명운동이 활발하게 재개됐다. 3월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대학가의 반체제 시위도 치열해지지 시작했다.

4월 8일 오전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에 대한 상고심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이날 오후 4시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임시국무회의를 소집, 오후 5시부터 고려대학교에 휴교를 명한다는 긴급조치 7호를 공포했다. 이튿날 새벽 이들 8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됐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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