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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내년 아내 생일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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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내년 아내 생일엔 꼭…

입력
2003.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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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새 달력을 받으면 아내는 제사나 생일 같은 집안의 대소사가 있는 날에 동그라미를 해 두곤 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검은 수성 사인펜으로 진하게 동그라미들을 해둔 것을 보면 분명 내가 관심을 갖고 기억해주고 은근히 챙겨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그러나 무감각하고 멋없는 나는 매번 그런 아내의 마음도 몰라 주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아내와 결혼한 지 22년이 됐지만 아버지 제사 하루 전날인 아내의 생일을 내가 직접 챙겨 준 적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그나마 아내가 달력을 몇 번이나 쳐다보며 무언의 압력을 가해 마지못해 기억한 게 고작이었다. 올해도 아버지 제삿날이 되어서야 아내의 45번째 생일이 벌써 지나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10년 전쯤인가. 그 날만큼은 아내의 생일을 축하해 주겠다고 굳게 약속했건만 고향 친구들이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 바람에 그날 밤 약속을 어기고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아내의 생일을 안주거리로 2차까지 하고 고주망태가 되어 밤 12시쯤에야 들어왔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고 있던 아내는 어이가 없었던지 날 보고도 넋 나간 사람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술 김에 무작정 넙죽 큰 절을 하며 "미안해"라고 말했다. 아내는 포기했다는 듯 그냥 "왜 그렇게 많이 마셨냐?"고 묻기만 했다. "응, 당신 생일이라 모처럼 친구들과 2차로 노래방 까지 갔었지." 황당한 표정이 된 아내는 "내 생일인데 주인공도 없이 왜 자기가 친구들과 기분을 내요, 참 이상하네요"하고 쏘아 붙였다.

술이 깨고 나니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다. 아내의 생일을 핑계 삼아 친구들과 술 먹고 늦게 들어온 것도 모자라 2차까지 계산한 술값 영수증도 만만치 않았다. 그 영수증을 들여다보며 희망 잃은 눈빛으로 "우리 식구 열흘 부식 값이네"하고 쓸쓸히 내뱉던 아내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무책임하게 자제력을 잃고 우유부단했던 내 행동이 몹시 후회가 된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뼈저린 자책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아내의 생일을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챙겨주지 못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늘 잊어버리는지 나 자신도 한심할 따름이다. 무슨 묘수가 없을까….

이제는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는 아내다. 그냥 생일을 자축하는 눈치고 올해도 나더러는 "생일이 별난 날인가요, 뭐. 배 아파 가며 나를 세상에 있게 해준 엄마한테 감사하는 날이지"라고 한 차원 높이 말해 버렸다.

올해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했지만 내년에는 꼭 아내의 생일을 기억했다가 아내를 감동시켜줘야지. 궁색한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 1순위가 아내임을 아내가 잊지 말아주기를 소망, 또 소망해본다.

/노병옥·독자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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