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9월13일 서울 장충체육관. 관중들의 함성 속에 제5대 천하장사에 오른 이준희가 모래판에 털썩 주저앉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5수만에 오른 정상이었지만 승부를 초월한 듯한 그의 모습에 팬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선수생활 5년, 그리고 지도자로서 15년동안 민속씨름과 '씨름'해온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46·신창건설 감독). 10일 오후 보령장사씨름대회가 한창이던 충남 보령의 대천체육관에서 그를 만났다.덩치만 컸던 아이
"씨름, 알고 보면 재밌어요. 모래판에 몸이 닿기 1㎝ 직전에서도 상대를 뒤집는 장면이 속출할 만큼 씨름도 알고 보면 짜릿하고 묘미가 대단해요. 개인적으로는 야구보다도 아기자기하다고 생각해요." 씨름 예찬론을 앞세운 그는 "세대교체가 안되면서 씨름판이 위축돼 안타까울 뿐"이라며 "민속씨름 1세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모래판의 부활에 나서야 한다"고 씨름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감독이 샅바와 인연을 맺은 것은 70년 봉양중 2년 시절. 당시 봉양중 씨름팀이 그 해 10월 전국대회에서 우승, 경북 의성시내에서 퍼레이드를 벌인 것을 본 형이 그를 씨름판으로 이끌었다. 14살 어린 나이였지만 키 170㎝에 몸무게 76㎏, 누가 봐도 당당한 체구였던 것이 계기였다. 형은 그런 그를 봉양중으로 전학시켰고 그곳에서 평생의 씨름 스승인 김태성(현 경북씨름협회 회장)선생을 만나 샅바 인생을 시작했다. 계속되는 강훈에 지친 이 감독은 샅바를 벗어던질 결심을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씨름선수로 틀을 잡아갔다.
서울 한영고로 진학한 그의 고교시절은 화려하지는 못했다. 단체전에선 번번이 홍현욱의 대구 영신고에 나가 떨어졌고 개인전에서도 8강에 든 것이 최고의 성적. 그런 그가 단국대에 입학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1년때인 76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이후 78년부터 4회 연속 우승을 차지, 홍현욱과 함께 모래판을 양분했다.
모래판의 우등모범생
대학졸업과 함께 그는 잠시 한눈을 팔았다. 사업에 뛰어든 것. 그것도 잠시뿐. '내길은 이것이 아니다'란 판단을 한 그는 다시 샅바를 잡았다. 83년 4월. 마침내 민속씨름이 출범했다. 백두장사 결정전에서 맞수 홍현욱을 꺾고 정상에 오른 이준희는 제1회 천하장사도 눈앞에 놓인 듯 했다. 하지만 스포츠는 이변의 게임. 4강에서 끈끈하게 덤벼드는 이만기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허탈함으로 모래판에 앉아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아픔도 잠시뿐. 다시 강도 높은 훈련에 매달렸고 이어 열린 3개 대회 백두장사를 모두 차지했다. 하지만 천하장사와는 인연이 멀었다. 2회땐 8강에서 이만기에게 또다시 발목이 잡혔고 3·4회때도 각각 장지영과 이만기에게 꽃가마를 양보해야만 했다.
그가 천하장사의 꿈을 이룬 것은 서른살 늦깎이 때. 제5회 천하장사 결승전에서 '오뚝이' 손상주를 꺾고 4번을 미뤄온 꽃가마에 올랐다. 그는 "별 감동도 없었고 '드디어 한번 했구나'란 생각 뿐이었다"며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후 8회에 이어 87년 10월 3번째로 천하장사 타이틀(13회)을 차지한 뒤 뜻밖의 은퇴선언을 했다. "1,2년은 더 뛸수 있었지만 정상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민속씨름 5년동안 3번의 천하장사와 7번의 백두장사, 특히 13번의 천하장사 대회에서 모두 8강에 진출했고 단 한번을 빼고 모두 4강에 올랐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기록이었다. 그만큼 그는 성실했다.
새로운 지도자 생활
샅바는 풀었지만 씨름과의 또다른 씨름은 계속됐다. 김학룡 감독과 함께 코치로 모래판에 다시 섰다. 코치시절 팬으로 만나 3년여간 열애하던 아내와 결혼도 했다. 그러나 코치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93년 11월 프로씨름단 럭키증권(현 LG투자증권)이 그의 '신선한 이미지'에 반해 러브콜을 보냈다. 민속씨름 선수출신 1호이며 36세 최연소 감독.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감독생활을 시작한 그는 95·96년 모두 25번의 우승을 일궈냈고 98년 9월 경주에선 단체, 한라, 백두, 지역장사를 독식, '그랜드 슬럼'을 달성했다.
시련도 있었다. 2000년 성적이 추락하며 급기야는 팀내에서 감독 교체설까지 나왔다. 다음 해까지 무난히 LG를 이끈 그는 2001년말 새 인생을 위한 결정을 내렸다. 8년간 몸담았던 LG에 사표를 던졌다. 그는 "떠나고 싶어서 떠났다. 회사가 아닌 감독도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말을 아꼈다.
신창 씨름단을 맡은 지 이제 1년 5개월. 최근 10억여원을 들어 선수를 보강했지만 아직까진 전력이 약하다. 지난해에는 황규연의 익산지역장사 우승이 유일한 수확이었다. 올해는 다르다. 감독의 지략을 판가름할 수 있는 단체전에서 4개 타이틀 중 벌써 2개를 가져왔다. 이 감독은 "신창은 지금 커가는 과정이다. 올 하반기엔 좋은 성적을 보여줄 테니 지켜봐달라"고 당부했다.
/보령=박희정기자 hjpark@hk.co.kr
■홍현욱이 본 친구 이준희
홍현욱과 이준희. 57년생 동갑내기다. 고교시절 모래판의 라이벌로 만나 서로를 채찍질했고, 좌절이 있을 땐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아픔을 달랬다. 그리고 영광의 순간엔 가장 먼저 따뜻한 축하의 말을 전했다. 샅바를 푼 이후에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로 민속씨름 발전을 위해 밤을 지새며 함께 고민했다. 둘은 서로를 '영원한 친구'라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홍현욱(한국씨름연맹 경기실행본부장·사진)은 이준희 감독에 대해 "말이 없으면서도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대단한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고교시절. 홍 본부장은 "대단했다. 이 감독은 체격면이나 기술면에서 나보다 한수 위였다. 그러나 결과는 매번 나의 승리로 끝나 어떨 땐 미안할 정도였다"고 숨겨놓았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고교 1년때 뒤늦게 모래판에 뛰어든 홍 본부장은 2년만에 '모래판의 전설'로 통하는 김성률을 꺾으며 돌풍을 일으켰다.
"민속씨름 첫 대회 직전 '첫 천하장사는 너 아니면 나'라며 술잔을 기울였다"며 당시를 회고한 그는 "무명의 이만기에게 첫 타이틀을 넘겨주고 쓴 술잔을 권하며 서로를 달랬다"고 말했다. 홍 본부장은 모래판의 세대교체 바람에 밀려 한번도 천하장사에 오르지 못하고 87년 이 감독과 함께 샅바를 풀었다.
넌지시 이 감독의 단점을 묻자 "너무 자제력이 강해 화를 내야 할 때도 흥분을 하지 않는다"며 "화를 낼 때는 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98년부터 연맹에 몸담고 있는 그는 마지막으로 "감독으로서 좋은 성적을 내기를 바란다"며 "하지만 감독직에 너무 오래 머물지 말고 새로운 자리를 맡아 민속씨름 발전을 위해 함께 일했으며 좋겠다"고 당부했다.
/박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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