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직감 같은 것이 있다. 경험상 자세한 속내를 모르더라도 "이건 된다", "이건 아니다"라는 직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알티스에게 내가 전화를 건 것도 바로 그런 직감의 명령이 아니었나 싶다."진 윤, 바쁘지 않으면 볼티모어에 한번 들러 주세요." 내 전화를 받은 알티스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달리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알티스가 있는 볼티모어로 달려갔다.
"당신 말이 맞았소. 이제 8개월 밖에 안됐는데, 빚만 무려 50만 달러나 지고 말았소."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알티스는 휠라 신발 라이선스를 앤웰트 사에게 넘기고 월급쟁이 사장 노릇을 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순간 내 머리 속이 슈퍼 컴퓨터처럼 돌아갔다. 비록 한발 늦어 신발 라이선스는 알티스에게 빼앗겼지만, 하늘이 다시 내게 휠라와 인연을 맺을 기회를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만 듣는다면, 평생 만져보지 못할 돈을 벌도록 해주겠다. 당신의 재정 파트너를 한국의 종합상사로 바꾸고 신발 제조업체를 다시 알아보자. 단 나를 통해서 신발공급 계약을 맺어야 하는 조건을 지켜야 한다."
궁지에 몰린 알티스로서는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3시간 30분 동안 내 머리 속은 복잡했다. 뉴욕에 진출한 한국 종합상사 중 어디와 손을 잡아야 좋을지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무역 일을 10년 가까이 했던 경험상 나는 종합상사의 냉혹한 생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몫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대와 사업을 할 경우 어느 순간에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이 비즈니스 세계 아닌가.
결국 신발 사업에 관한 나의 전문성을 인정해줄 파트너를 찾아야 했고, 쌍용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 쌍용은 무역 분야에 뛰어든지도 오래되지 않은데다 소비재 분야에는 그리 밝지 않았다.
마침 쌍용 미국지사장이 고교 동창인 정영우라는 친구였다. 졸업 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 얼굴조차 기억 나지 않았지만,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역에서 전화를 걸었다.
"정영우씨 부탁합니다. 저는 서울고 16회 윤윤수라고 하는데…" 그러자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어이, 윤수. 그 동안 왜 연락이 없었어. 내가 너를 만나려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밤샘영업을 하는 강서면옥이란 음식점에서 영우를 만났다. 그는 지사장으로 발령 받은 뒤 1차 목표로 신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이 분야에 밝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실제로 신발사업은 당시 뉴욕에 진출한 한국의 종합상사들의 실적을 쌓기에 가장 좋은 분야 중 하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 지사장으로 건설자재 수출에 일가견이 있던 영우가 신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서로 뜻이 맞은 만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브랜드를 제공하는 휠라 본사, 라이선스 계약자인 알티스, 재정 파트너인 쌍용, 제품공급자인 한국의 신발업체, 그리고 에이전시인 나까지 5자 역할 분담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알티스와 만나기로 했던 영우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알티스는 "없었던 일로 하자"며 노발대발 화를 냈다. 알고 보니 영우는 갑자기 본사 회장이 뉴욕에 오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약속 장소인 맨하탄 44번가를 박차고 나와 기차역으로 향하던 알티스를 간신히 붙잡고 싹싹 빌어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어렵게 이루어진 계약 이후 사업은 순풍에 돛 단 듯 순항을 거듭했다. 휠라의 신발 사업은 불과 4개월 만에 800만 달러 어치를 수출할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빚더미 속에 빠져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알티스는 나를 은인처럼 여겼고, 내게 그 이상의 보답을 해줬다. 엄청난 돈을 번 알티스는 휠라 사업에서 손을 떼면서 91년 휠라 코리아가 출범할 때 본사에 나를 사장으로 추천해줬다.
휠라와의 인연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보니 나의 삶이 달콤한 성공담처럼 보일까 두려워진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계속되는 좌절과 역경 속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세월의 연속이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