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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 대통령의 사람들]<11>권력의 균열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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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 대통령의 사람들]<11>권력의 균열 ⑧

입력
2003.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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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11일 새벽, 신광옥(辛光玉) 법무차관은 검찰을 출입하는 KBS L기자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신 차관은 "난리가 났다"는 L기자의 말에 "무슨 난리냐"고 반문했다. L기자는 "중앙일보 보셨느냐, (신 차관이) 진승현으로부터 돈 1억원을 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면서 "그 보도가 사실이냐"고 물었다. 신 차관은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냐"며 강하게 부인했다.곧 이어 다른 기자들의 전화가 이어졌다. 신 차관은 중앙일보를 찾았다. 거기에는 '신광옥 차관, 민정수석 때 진승현 돈 1억원을 받았다'는 1면 톱 기사가 실려 있었다. 신 차관은 그 기사를 보는 순간, 한 검찰 고위간부의 얼굴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려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기사 중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진승현이 검찰 수사팀에 "금융감독원이 검찰에 고발하기 직전(2000년 8월말) 신 수석을 만나 금감원과 검찰에 선처를 요청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골프가방에 든 1억원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접한 신 차관은 "진승현에게 단 한 푼이라도 받았다면 할복 자살하겠다"고 격분했고 언론중재위에 정정보도를 청구했다. 그러나 신 차관의 결백 주장은 언론의 포화 속에 묻혔고 결국 12월 14일 사표를 냈다. 그는 이어 12월 19일 검찰에 출두했으며 그로부터 3일 후인 22일 구속됐다. DJ 정부에서 대검 중수부장, 민정수석, 법무차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친 핵심 인사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신광옥씨는 지금도 중앙일보 기사는 물론 자신의 구속에 대해서도 승복하지 않고 있으며 그 배경에 음모가 있다고 믿고 있다. 실제 중앙일보 기사 중 핵심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기밀'이 왜 그 시점에서 흘러 나왔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당시 검찰이 내놓은 구속 사유는 신 전 차관이 2000년 3월부터 10월 사이에 진승현 회사의 고문격인 최택곤(崔澤坤)씨로부터 진씨의 구명 로비 명목으로 300만원씩 6차례에 걸쳐 1,8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보강 조사를 통해 건축업자 K씨가 해양수산부 인사 청탁을 하면서 주었다는 500만원 등을 혐의에 추가했다.

문제는 신 수석에 돈을 준 사람은 진 씨가 아니라 최 씨였으며 액수도 골프가방에 담긴 1억원이 아니라 1,800만원이었다는 점이다. 뇌물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돈 준 사람과 액수가 틀렸기 때문에 중앙일보 특종은 오보라고도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 있다. 뇌물 사건에서는 통상 한 번에 돈이 넘어가는데, 민정수석에게 구명 로비를 하면서 한 번에 300만원씩 여러 번 주었다는 것은 뭔가 어색하다. 이에 대한 당시 검찰의 설명은 '배달사고'였다. 최씨가 진씨로부터 신 수석에 준다는 명목으로 1억원(총 수수액 1억5,972만원)을 받아 그 중 일부만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씨는 법정에서 돈의 대가성을 부인했고 진씨도 신씨에게 어떤 부탁을 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이런 진술과 허점 때문에 2심 재판부인 서울 고법 형사4부는 금년 2월 11일 "진씨가 최씨한테 신씨에게 돈을 주라고 시킨 적이 없는데다 최씨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며 신씨의 진승현 관련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신광옥씨가 시인한 건축업자 K씨의 500만원을 받은 대목만 유죄로 인정했다.

무죄 판결이 나오고 검찰 기소에서도 사실이 아니었던 '신광옥 1억원 수수'를 중앙일보는 왜 1면 톱으로 썼을까. 검찰 내부의 누군가가 확신을 심어주지 않았다면 그런 기사가 나올 수 없었다는 게 신씨 구속을 음모로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당시 검찰 주변에도 음모론이 크게 두 갈래로 퍼져 있었다.

하나는 진승현 구명에 앞장섰던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이 진씨 돈을 받은 거물들의 명단을 작성했는데 그 리스트에 '신광옥 1억원 수수'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김 전 차장은 진씨 수사가 시작됐던 시점인 2000년 9월 검찰 수뇌진을 찾아가 이 리스트를 보여주며 "수사하면 난리 난다"고 압박했고, 이 과정에서 리스트를 보게 된 검찰의 누군가가 중앙일보에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씨 구속 1년 뒤인 2001년 11월말∼12월초 수사 검사들이 진씨를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신 차관에게 1억원을 주었다"는 진술을 받아내 검찰 수뇌부에 보고했는데, 이를 접한 검찰 간부가 흘렸다는 것이다.

당시 실무 검사들이 수사 상황을 보고하는 라인은 서울 지검 특수1부장(朴榮琯·목포고)-서울지검장(金大雄·광주일고)-검찰총장(愼承男·목포고)이었다. 이들 중 신 차관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신 총장이 누설의 당사자로 지목됐다. 특히 신 총장의 동생 신승환씨가 또 다른 금융비리범인 이용호에게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신 차관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신 총장이 신 차관을 괘씸하게 보고 있었고 그 반감이 수사기밀 누설의 한 배경이 됐다는 얘기가 검찰 주변에 그럴듯하게 퍼져있었다.

중앙일보가 언론중재위에서 정보 소스를 '검사장급 이상 검찰 간부'라고 밝힌 것도 신 총장이 시선을 받게 된 한 이유가 됐다.

시사주간지인 시사저널(2003년2월27일)은 '신승남과 신광옥은 원수였다'라는 기사에서 국정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 "중앙일보 보도가 나오기 직전 신 총장과 홍석현(洪錫炫) 중앙일보 사장이 메리어트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신 총장이 '기밀'을 흘렸다는 뉘앙스의 보도였다. 더욱이 신광옥씨가 대검 중수부장 시절인 1999년 10월초 홍 사장을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 중앙일보와 악연이 있어 음모론적 추리는 기정사실처럼 자리 잡았다.

수사 과정에서도 석연치 않은 흔적이 남아 있다. 우선 신씨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는데도 돈을 주었다는 최택곤씨에게 뇌물공여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형식 논리상으로만 보면 뇌물을 준 사람은 없는데 뇌물을 받은 사람만 있는 셈이다. 또 수사 기록에 최씨와 가족의 계좌에 거액의 뭉칫돈이 있었는데도 그 출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이다. 신씨 측에서는 "검찰이 최씨의 약점을 잡고 거래를 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음모의 당사자로 지목된 신승남씨는 "결코 언론에 정보를 흘린 적은 없다"면서 "누군가 짐작은 가지만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신 전 총장의 얘기. "신 차관은 구속을 자초했다. 액수가 많지않아 불구속이 대세였다. 그러나 문제가 터졌다. 최택곤이 신 차관이 자신을 '사기꾼'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듣고 건설업자 K씨의 500만원 건을 불었다. 만약 신 차관을 구속하지 않았는데 최택곤이 재판에서 이 사실을 진술하면 난리가 나지 않았겠느냐. 그래서 구속했다."

다른 의문들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홍석현 회장과의 회동설)언론사 회장을 커피숍에서 만난다는 발상 자체가 유치하다. 그 보도에 대해서는 법적 조치를 생각중이다. (김은성의 협박설) 김은성은 나를 어려워했다. 감히 그런 얘기를 할 처지가 못됐다. 김은성은 '진승현과 혼담이 오가는데 괜찮겠느냐'고 묻길래 '100% 구속이다'고 알려주었을 뿐이다. (동생 신승환의 이용호 게이트 연루문제) 이미 나도 알고 있었다. 국정감사에서 밝히려 했으나 일부 언론이 쓴다고 해서 공개했다."

당시 이를 취재한 중앙일보 한 기자의 얘기. "신 차관의 연루설을 듣고 보도 전날 밤 확인에 들어갔다. 전화를 거니 신 총장은 술 자리에 있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간 끝에 '기사를 쓴다'고 했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다른 자리에 있던 김대웅 검사장은 더 취해 있었다. '무슨 소리냐.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썼다."

이에 따르면, 신 총장이나 김 검사장은 제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기사화에 간접적으로 조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광옥씨의 얘기는 다르다. 신 전 차관의 증언. "내가 구속돼 있을 때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중앙일보 최고위층이 찾아왔다. 정말 미안하다고 하더라. 나는 '사실도 아닌 1억원 수수를 어떻게 보도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강남의 큰 서점에서 신문사 간부가 검찰 고위인사로부터 관련 자료를 받았다. 그러니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느냐'고 했다. 그 순간 느낀 배신감과 분노는 지금도 나를 갉아먹고 있다. 검찰 기자의 취재 차원이 아니다. 당시 이용호 게이트 특검을 앞두고 물꼬를 돌리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 희생양이 나라고 생각한다."

신광옥 구속을 둘러싼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누가 흘렸는지, 음모가 있었는지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드러난 검찰 내부의 복잡한 갈등, 특히 신승남-신광옥의 감정적 앙금은 DJ 정부의 균열 중 상당부분이 검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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