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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30번째 개인전 서양화가 김점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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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30번째 개인전 서양화가 김점선씨

입력
2003.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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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김점선(57·사진)씨는 여전히 자유 그 자체였다. 가위를 들고 직접 자른 머리는 잔뜩 삐쳐있었고, 아파트 베란다에는 잡풀이 우거져 있었다. 거실에는 천장까지 닿는 그림이 빼곡했다. 그가 16일부터 6월 21일까지 서울 강남구 역삼동 스타타워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서른번째 개인전이다. 단순한 선과 선명한 색채, 동화적인 그림으로 독특한 자기세계를 갖고 있는(오광수 국립미술관장 평) 김씨는 "이번 전시회를 마치면 다시는 전시회를 안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들떠있었다. 그동안 화랑에서 거부된 작품까지 전시해 그야말로 '김점선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에 여한이 없다는 것. 겸업이 없으면 화가로서 자생이 힘든 한국 풍토에서 김점선은 뒷산의 풀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여먹을지라도(책 '나, 김점선'에서) 전업화가의 길을 걸어왔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남편을 1998년 암으로 잃은 뒤 주춤했던 그의 작품활동이,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로부터 최우수예술가로 거푸 꼽히던 80년대 후반처럼 활발해질 것인지…

―작년 11월에 29번째 전시회를 갖고 벌써 30회다. 요즘 그림이 잘 그려지나.

"아들도 독립해서 나가 살고 나 혼자 있으니 그림 그리는 일밖에 없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야 먹고, 잠도 졸려야 잔다. 새벽 세신데도 그리고 있을 때도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최근작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10년전에 그린 작품도 있고 15년전부터 그리다 올해 완성된 것도 있다. 전에는 가장 큰 작품이 30호였는데 이번에는 가장 작은 것이 30호다. 그것도 덩어리로 전시한다. 말 그림 한 개가 30호인데 그걸 9개 모아놓으면 270호다. 130호짜리 붓꽃도 네 다섯개 모아놓을 참이다. 600호 그림이 나오는 거다. 김점선이 가진 것이 다 나온다. 그동안 거부당해 보여주지 못한 것, 쓸쓸하고 거칠고 무지 단순한 것, 그게 나온다. 이 말그림 봐라. 진짜 단순한 어린이 그림이다. 그러나 진짜 어린이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키도 안 닿고 하루 종일 붓질해야 나오니까. 이런 그림을 누구나 그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그림을 사인해서 내보낼 수는 없다. 팔리지 않을 것도 걱정되고 바보인게 폭로될까봐 쫀다. 그런데 이 그림 보면 '이 사람은 머리가 단세포적이고 거의 짚신벌레 수준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걸 공개한다. 어떤 사람들은 김점선을 '순수한 자연인'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런 그림을 내놓는 것은 투쟁이다. 어른들은 이렇게 단순하면 안되냐, 하는 반항이다. 예술하면 뭐 생각해? 성스러우면서도 노동이 집약된 것,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술이라고 한다. 이렇게 부드러운 그림을 세상에 내는 것은 '발표'다. 그런데 나처럼 단순한 그림을 내는 것은 '투쟁'이다. 83년에 첫 개인전을 할 때도 친구들이 남편을 불러서 "전시회를 막아라. 제가 미쳤는지 안 미쳤는지 불확실한데 전시회를 하면 미쳤다는 게 확실해진다"고까지 했다. 모노크롬의 비구상이 판칠 때인데 내가 유치한 색상에 유치한 그림을 냈다. 그런 걸 내는 것은 투쟁이다. 사회통념에 대한 투쟁. 이번에 130호 붉은 말 3개를 모아놓는다. 시퍼런 붓꽃 4개도 딱 붙였다. 왜 붙였냐? 내 맘이다. 그러니까 29개 전시회를 다 본 사람도 김점선에 대해 교정당할 것이다. 그동안 상업화랑의 초대전을 많이 했다. 남들은 부러워하지만 그건 편집된 모습이다. 진짜 김점선, 거칠고 외로운 모습을 이번에 보여주는 것이다."

―주제가 바뀌었나. 무엇이 편집을 당했나.

"말 붓꽃 백합 나리꽃 주제는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를 쓰고 작은 작품을 부탁한다. 첫 개인전을 한 뒤 작품은 잘 팔려나갔다. 88년쯤 되니까 사람들이 소품을 사려고 줄을 섰다. 보통 찾는 것이 15호짜리다. 화랑에서 1주일이면 네 명이 찾아온다. 소품 그려달라면 소품 그려주고 그러면 돈은 쌓이지만 이들의 요구만 들어주다간 소품만 쌓아놓고 죽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100호 캔버스를 100개 주문했다. 소품은 전부 창고로 치웠다. 100호가 100개면 지붕까지 쌓인다. '그림 사러 갈게요' 그러면 '소품 없습니다' 그런다. 그래도 온다. 와서 보고는 '진짜네' 그러고 돌아갔다. 그러고 그리기 시작했다. 조그만 것 찍어내면 내가 화간가. 거칠고 크고 그런 걸 그렸는데, 큰 그림을 그리니까 오는 사람이 줄면서 창작할 고요가 생겼다. 그런데 이런 작품이 전시가 되질 않는다. 화랑이 대부분 좁으니까 30호만 넘어도 치운다. 그림도 부드럽고 온화한 것만 전시한다. 그래서 내 전시를 한 두번 본 사람들은 내가 평화롭고 잔잔한 그림을 그리는 인간으로 알고 있다. 나는 내 머리칼처럼 헝클어지고 뒤범벅이 된 파괴적인 충격을 주는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이번에 친구들의 놀란 얼굴을 보고 싶다."

―당신의 그림을 가장 먼저 알아준 사람은 누구였나.

"프랑스에서는 화가가 그림을 300점을 팔면 자생력이 생긴다고 한다. 전업작가로 살면 무지 불안하다. 그래서 500점이 팔릴 때까지 전부 기록했다. 86년쯤에 300점이 팔렸는데 쌀이 없어도 느긋해지더라. 그림 1점당 마니아 10명이 있는 거니까 300점이면 3,000명의 마니아가 확보된 것이다. 내가 치명적으로 나쁜 일만 안하면 이들이 나를 지원해준다. 화가가 자기세계에 순수하게 몰입하고, 순수하게 표현하고, 투쟁하듯이 목숨걸고 발표하고 그러면 감성에서 내 수준에 이른 사람이 반응하고 그러면서 내가 산다. 75년 그룹전에 나온 그림을 보고 사준 씨티뱅크가 첫 고객이고, 한국인으로는 상아치과 원장인 윤흥렬씨가 '리빙아트'라는 가게에 걸려있는 걸 보고 사준 게 처음이다. 다들 시대조류에 맞는 현대적인 개념미술에 몰두할 때 혼자 유치찬란한 그림을 그리다가 왕따를 당하던 시절, 이런 사람들이 내 생의 늪에 심을 박아주었다."

―이런 화려한 색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반항이었다. 서구식 색도표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물감통을 뒤에 놓고 붓을 등뒤로 뻗어 아무거나 잡히는 색깔로 칠을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더러 '색을 잘 쓰셨네요' 했다. 웃기는 소리다. 이 세상의 모든 색은 잘 어울린다. 최초의 원시인처럼 눈앞에 펼쳐진 색깔을 표현하고 싶었다. 초기에는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그림을 매개로 전해주자, 보는 이가 그걸 보며 부싯돌처럼 불꽃이 일어나면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마련해주면 빨리 다른 부싯돌을 주고 싶어서 또 다른 작품으로 넘어간다."

―말과 붓꽃을 가장 사랑하는가.

"말은 넓은 들판을 뛴다. 힘차게 달린다. 말이 달리는 걸 보면 내가 내 근육을 사용해서 시원하게 달리는 것 같은 쾌감을 느낀다. 단순하고 활달한 성질이 좋다. 바람에 날리는 갈기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붓꽃의 파란색이 좋다. 파란 붓꽃과 잎사귀초록이 붙어있는 건 시각적인 조화의 절정이다. 몇 시간이고 몇 년이고 몇 인생이라도 그걸 바라보기만 하면서 보낼 수도 있다."

―화가라서 행복한가.

"그림을 실컷 그릴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쁜 점도 있다. 좋은 그림을 팔아먹고 사는 것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를 그럴 때 부러워한다. 화가는 돈을 받으면 그림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러면 심장이 뽑혀 도둑맞은 듯하다. 그럴 때 나는 하염없이 운다. 없어진 그림을 그리워하면서…."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김점선씨는 이번 전시회 주제를 '디카로 찍어라'로 하려고 했다. 팸플릿 따로 제작하기도 아깝고, 그림이 워낙 큰 만큼 사람들이 디지털 카메라를 가져와 좋아하는 부분을 찍어가서 컴퓨터의 바탕화면으로 삼으라고 했다. 디지털카메라로 그림을 찍어서 씨디로 구워주는 계획까지 잡아놓았었다. 그런데 계획이 약간 바뀌었다. 워낙 복제가 흔한 세상이라, 그림 전체를 담게 해주었다간 겉잡을 수 없다는 화랑주인의 말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현지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진찍기는 여전히 가능하다고 한다.

그가 '디카로 찍어라'를 제안한 것은 아들의 영향이 크다. 성균관대 전기 전자 컴퓨터 공학부를 나온 아들(24)은 지금 벤처회사에서 군복무를 대신한 근무를 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가 작년에 오십견이 와서 그림을 못 그리고 울자 컴퓨터를 사들고 왔다. 새로운 걸 배우는 기쁨에 김점선은 통증을 잊었다. 컴퓨터를 갖고 새벽까지 그리기도 했다. 김점선은 컴퓨터 그림이 "더 빨리 완성되고 더 자유롭게 표현된다"고 한다. 아마 무단복제를 막을 방법만 생긴다면 그는 영영 컴퓨터 그림으로 돌아서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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