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전국 패트롤]증평 郡승격과 증평잃은 괴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전국 패트롤]증평 郡승격과 증평잃은 괴산

입력
2003.05.14 00:00
0 0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두 고장의 희비가 엇갈렸다. 충북 괴산군이라는 이름아래 90년 동안 공존했던 괴산과 증평은 지난달 30일 멀리 서울에서 들려온 '땅! 땅! 땅!' 국회 의사봉 소리를 신호로 두개 군으로 갈라섰다. 충북도 직할 출장소라는 기형적인 문패를 달고 겪어야 했던 설움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그 밤 증평 읍내엔 장고와 꽹과리가 실컷 울어댔다. 하지만 재너머 잔치를 바라보는 괴산 주민들의 속은 편치 못했다. 멀쩡한 제 살을 도려냈으니 어련했을까. 급기야 점잖은 충청도 양반이 이웃 잔치에 재를 뿌리고 말았다.

"꿈★이 이루어졌시유"

증평읍은 화사한 봄 햇살에 들떠 있었다. 거리 곳곳엔 월드컵 열기가 되살아난 듯 '꿈★이 이루어졌다'는 플래카드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다. 증평 주민에게 군 승격 소식은 월드컵 4강신화 저리 가라였다.

증평장 채소가게 앞의 조촐한 막걸리 판. 술잔을 건네던 김영창(68) 할아버지는 "진급 되니까 좋아유. 옛날엔 2,000원짜리 서류 쪼가리 하나 받는데도 교통비가 더 들고 한나절이 걸렸는데. 말도 마. 큰 눈이라도 오면 고갯길이 막혀 발만 동동 굴렀지"라고 말했다. 턱에 묻은 술 방울을 훔치던 김춘수(71) 할아버지도 손가락까지 꾹꾹 눌러가며 거든다. "군청 생기고 경찰서도 생기면 늘어나는 공무원만 얼마야. 사람이 늘면 장사도 잘되고 장사가 잘되면 세금 걷어 발전도 시키고…." 꼬리를 무는 계산법에 신이 났던지 박모(69) 할아버지도 한마디. "봐라. 모래재 안쪽에 있는 청안(면) 사리(면) 사람들도 증평군 하겠다고 덤벼들거다."

무려 10년을 싸웠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탄원서를 내고 결의대회를 열고 지난해 총선 때는 선거 포기투쟁까지 벌였다. 그렇게 매달렸지만 군 승격은 말 그대로 증평 주민들의 꿈이었다.

1990년 괴산읍과 거리가 멀어 불편을 겪던 증평 주민들의 편의와 시 승격을 전제로 시작된 충북도 직할 증평출장소 시대. 인구 5만 명이 돼야 시 승격이 가능하지만 입에 풀칠하기 위해 도시로, 도시로 떠나는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읍과 도안면까지 합쳐도 부족한 2만 명을 채우기 위해 주민등록 이전 운동까지 벌였지만 시대의 대세를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군 승격이었고 결국 지역 국회의원의 발의로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꿈이 현실이 됐다.

지방자치단체 광역화 추세를 뒤집었다는 비난과 내년 총선을 의식한 지역 국회의원의 얄팍한 정치논리라는 비난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주민들은 손사래부터 쳤다. "셋방살이 설움 안 당해보면 몰라요. 같이 땅파먹고 살아도 저쪽은 보조금이 우리보다 꼭 1,000∼2,000원 많아요." "지방자치 시대 미아로 전락해 예산도 못 짜고 장기계획은 엄두도 못 내는 찬밥 신세였어요." "우리가 양반이라 지금까지 끌어온 거지 전라도 경상도였으면 벌써 사단이 났을 거요." 박영우(67) 할아버지는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고 했다. "괴산까지 40리 길이유. 고개까지 버티고 있고. 더구나 지금 괴산군은 일제가 지역 주민들 분열 생기라고 저쪽은 연풍현, 이쪽은 청안현이던 것을 억지로 붙여 논거유. 수계도 이쪽은 금강, 저쪽은 한강 수계유."

주민들의 참여열기도 뜨겁다. 벌써 증평군설치 범주민회도 꾸렸다. "헌정 사상 주민 힘으로 군을 만든 건 우리가 처음이유. 한번 지켜 보세유. 진짜 지자체가 뭔지 보여줄 테니."

"10년 안에 증평군 괴산면 될거유"

증평에서 해발 228m 모래재를 넘어 30분 걸려 도착한 괴산읍은 봄비가 우악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읍 중심가는 임대 광고가 붙은 빈 점포가 어지럽게 널려 스산했지만 플래카드만은 증평 못 지 않았다. 허나 플래카드 내용은 정반대였다. '괴산은 어쩌란 말이냐' '증평군 승격 반대'

괴산 주민들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설마가 사람 잡았다"는 말로 최근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어차피 안될 거 선심 쓰듯이 군 의회에서 증평군 설치 법안을 통과시켜준 것이 화근이었다. 그 법안이 결국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지난달 23일 부랴부랴 27개 사회단체의 괴산 유지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지만 사태를 걷잡기엔 이미 늦었다. "나라님이 해주는 대로"에 단련된 괴산 사람들이 증평 주민들의 모질고 발 빠른 행보를 당할 수는 없었다. 1일에는 100여명이 모여 반대 집회도 열어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대도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괴산이 죽는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신문지 위에 볼펜으로 휘휘 괴산 지도를 그리던 한 주민(36)의 설명은 이랬다. "증평이 군이 되면 괴산은 1읍 10면인데, 이중 재너머 청안 사리가 증평군이 될 확률이 높고 달천댐 후보지인 불정 등 3개면이 물에 잠기고… 언젠가 증평군 괴산면이 될거요." 괴산 청년회의소 최은묵(39) 회장은 "인구 1만 명인 괴산읍만 해도 매년 1,000여명이 빠져나갑니다. 군세가 약해지면 공무원도 빠져나갈 테고, 60대 이상 노인인구도 50%"라고 했다. 10년 후면 아무도 안 남는다는 얘기다.

더구나 증평은 10년 꿈을 이뤘지만 괴산은 아직 10년 군 현안 사업이 제자리 걸음이다. 대진대가 그렇고 진로 공장이 그렇고 터만 닦아놓고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달천댐 건설 논의도 주민 반대에 부딪쳐 10년 뒤로 미뤄지면서 땅값이 곤두박질쳤다. "안 되는 것은 척척 해주면서 이미 약속한 일도 안 해주고 있으니 더 열 받는 거 아닙니까. 반대 집회도 증평이 미워서가 아니라 정치인들이 미워서 그런 거요." 괴산 주민들의 솔직한 속내다.

지역의 한 6선 국회의원을 공격하는 주민도 있었다. "출장소를 만들어준 사람이 그 양반 아니요. 그 뒤로 지역 감정 생기고 괴산이 망한 거요." 다른 주민은 증평 군 승격을 도운 지역 국회의원에게 화살을 돌렸다. "지난 선거 때 괴산에서 표가 안 나오니까, 아예 우린 버리고 증평 표라도 얻을 속셈이지 뭐."

오해 풀고 형제처럼 살자

증평 사람들이 괴산 주민들의 불만을 모를 리 없다. 증평시민회 이종일(51) 공동대표는 "교통입지가 좋은 증평은 도시화하고 산세가 좋은 괴산은 관광단지로 조성해 연계하면 좋을 것"이라며 "달천댐 문제 등 괴산 현안에도 힘을 보태 한 지붕에 살았던 형제애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괴산 사람들도 차츰 울분을 삭이고 있다. "증평은 10년 동안 시민단체를 만들어 꿈을 이뤘는데 우린 변변한 시민단체 하나 없더라구요. 이참에 증평에서 배워올 참입니다. 괴산사랑회를 만들어 앞으론 남 핑계 안 대고 우리가 괴산을 살려야죠." 모래재를 넘는 2차선 도로 옆에는 괴산과 증평의 민심까지 이을 4차선 도로 확장공사가 한창이었다.

/괴산·증평=글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사진 최종욱기자

■초미니 증평군

독립 자치단체의 꿈을 이룬 증평군은 내륙에서 가장 작은 초미니 군이다. 면적은 82㎢로 섬인 울릉군(72.78㎢)을 제외하면 가장 작다. 증평읍과 도안면 등 2개 읍면에 불과해 3개 읍면으로 구성된 울릉군보다 행정구역이 적다. 다만 증평의 인구는 3만940명으로 전북 진안, 강원 양양 등 전국 9개 군보다는 많다.

기초의원을 뽑는 선거구 역시 초미니로 기록될 전망. 독자적인 지방의회를 꾸리기 위한 원 구성 최소 의석 수가 7명으로 규정된 현행 선거법상 2개 읍면에서 7명의 지방의원을 선출해야 한다. 따라서 증평읍과 도안면에서 이미 선출된 지방의원을 제외한 5명을 뽑아야 하지만 인구가 2,700명에 불과한 도안면은 의원을 추가할 수 없어 결국 증평읍에서 6명을 선출하게 된다. 벌써부터 선거과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선거는 10월30일 치러진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