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여름, 일본 도쿄 긴자(銀座)의 소니 본사에서 열린 PC사업부의 기획회의는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소니의 자존심을 살릴 PC를 개발하라'는 특명을 받고 부임한 안도 쿠니타케(安藤國威·59·현 소니 사장) 본부장이 주재하는 첫 회의였다.컬러TV, 워크맨, 캠코더 등 오디오· 비디오 분야의 맹주로 군림하던 소니였지만 PC만은 예외였다. 80년대 이후 수없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NEC, 후지쯔, 도시바 등에 밀려 번번히 실패를 거듭했다. 회사 안팎에서 '소니는 가전회사'라는 자조섞인 평가가 이어졌고, 'PC는 소니의 불명예'라는 말까지 나왔다.
"소니 스타일(sony style)을 밀고 나갑시다." 안도 본부장의 한 마디가 침묵을 깼다. "지금까지 소니의 PC는 전혀 소니답지 않았습니다. 오디오· 비디오(A/V)에서 다져진 기술로 '소니다운 PC'를 만들어 봅시다."
세련된 디자인, 강력한 멀티미디어 기능, 핸드백 속에 넣을 수 있는 깜찍한 크기로 전세계에 노트북PC 바람을 불러 일으킨 소니 '바이오'(VAIO)는 이렇게 탄생했다. '소니다운 것'의 모델은 다름아닌 워크맨. 소니를 일약 세계 최고의 가전기업으로 만든 '걸어다니는 오디오'(Walking Stereo)를 닮은 작고 예쁜 초소형 노트북이 '목표'로 낙점됐다.
그리고 소니의 최고 인재들이 개발진으로 차출됐다. 소니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고토 테이유(後藤禎祐)를 필두로, 소니의 내노라하는 엔지니어들이 속속 바이오 개발팀으로 옮겨왔다.
바이오의 상징인 보라색 금속 케이스는 소형· 경량화를 위한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디자이너 고토 씨는 "소니는 곧 경박단소(輕薄短小)라는 이미지를 구현키 위해 노력했다"며 "이를 위해 두꺼운 플라스틱 외형을 버리고 마그네슘을 채택했고, 고급스럽고 미래적인 느낌의 보라색을 테마로 삼았다"고 말했다. 또 좁은 공간에 소니의 장기인 A/V 호환장치들을 넣기 위해 배터리를 밖으로 꺼내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액정 모니터 뒷면 혹은 모니터와 본체가 맞닿는 부분에 넣는 것이다. 만만찮은 시도였지만 종이처럼 얇은 리튬 폴리머 전지와 가래떡 모양의 리튬 이온전지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했다.
진짜 어려움은 바이오에 대한 비관론이었다. 96년에 선보인 첫 시제품을 놓고 'PC는 가전제품이 아니다', '일본은 몰라도 실용성을 강조하는 해외시장에서는 어렵다'는 비난이 이어졌다. '차기 사장을 노리는 안도 본부장의 무리수'라는 음해까지 뒤따랐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바이오를 택했다. 97년 바이오의 첫 작품 'V505' 시리즈가 모습을 드러내자 80년대 '워크맨 열풍'을 뛰어넘는 '바이오 열풍'이 불었다. 불과 1년 만에 밀리언 셀러의 자리에 오르는가 하면, 일본, 미국, 독일의 노트북 PC 판매 순위 꼭대기에 소니의 이름이 등장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97년 이후 개인 수입상들을 통해 들어온 바이오 PC의 수는 5만여대에 육박한다. 2001년의 경우 소니 코리아의 연간 판매대수는 1만대 미만이었으나, 병행 수입된 제품까지 포함하면 2만대 이상이 팔렸다는 것이 업계의 예상이다. 올 1분기 바이오 노트북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8%선(1만1,000대)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이오의 성공은 노트북 PC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검은색의 '사무용품'에 불과했던 노트북 PC는 이제 젊은이의 최첨단 패션 아이템로 자리잡았다. 바이오를 흉내낸 초소형 노트북PC 들이 쏟아지면서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를 쓰는 '이동 컴퓨팅'이 가능해졌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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