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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서" 정직한 고백의 울림/김광규 시집 "처음 만나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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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서" 정직한 고백의 울림/김광규 시집 "처음 만나던 때"

입력
2003.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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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되어보지 못한 사람이 되어, 아무도 써본 적이 없는 글 쓰기를 소망했던 사람이 있었다. 소설가를 꿈꾼 문학청년은 유학을 갔다 와서 교수가 되고,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시인이 되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넣은 첫 시집을 냈다. 그 시집은 "앞으로도 소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으로 시작됐다.김광규(62)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문학과지성사 발행)를 펴냈다.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낼 때만 해도 원고지에 쓰던 글을, 이제는 디스켓에 담아 보내거나 이메일로 전송하게 됐다. 그만큼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그동안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멋쩍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 결혼하고 자식낳고 어느새/ 중년의 월급쟁이가 된 오늘'('아니다 그렇지 않다'에서)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있음을 보았다. 시인은 자신이 본 것을 정직하게 시로 옮겨 왔다.

'마지막'으로 시작했던 그가 '처음'으로 돌아왔다. 12일 만난 김씨는 "문학은 결국 생(生)이라는 한 글자를 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새 시집에 실린 시 '그것은'을 떠올리게 했다. '흔히 맥주 앞에 붙이듯/ 생(生)이라고/ 그렇게 한마디로 말하는 대신/ 구차스러울 만큼 이런 말 저런 말을 늘어놓으면서/ 되풀이하여 제 나름대로/ 삶을 그려보는 것 아닐까/ 그것은' 그러니까 그것은 '문학'이다. 생(生)은 시인이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답이다. '생'이라는 한 글자를 들고 그는 처음 시를 만나던 때처럼 머뭇거리며 '다시 경어로 말을 건다'.

새 시집은 탄생 이전부터 시작돼서 죽음 이후로 맺어진다. '어둠의 빗줄기 속에 잉태된/ 새끼 고양이'('줄무늬 고양이'에서)가 품었을 까만 줄무늬를 가늠해보고, '시여…'라는 말을 배운 두 돌 가까운 손주를 보고 '벌써/ 세상이/ 싫다니요'('시여'에서)라고 적는다. '하지만 떠나는 자를 배웅하면서 그 뒷모습을 기억하는 것은 뒤에 남은 자의 몫이 아닌가'('남은 자의 몫'에서)라는 시구를 통해 세상 떠난 아내를 묻은 남편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김씨는 "죽음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일직선의 생(生)에서 원을 보았다. 환력(還曆)을 전후해 쓰여진 시편에서 '죽음'은 더 이상 관념적인 시어가 아니며 매우 따뜻하게 만져진다. '내 발처럼 익숙해진 구두를 벗어야 하듯, 세상이 발에 맞는 신발처럼 편안하게 느껴질 때쯤, 우리도 세상을 떠나게 마련이다.'('새 구두'에서)

그는 시가 개인적·사회적 시대 상황의 반영이라고 믿는다. 그는 삶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시를 쓰는 것으로 이 믿음을 실천해 왔다. 시인은 체험과 사유를 평이한 시어로 쓴다. 숨가쁜 변화의 시간 속에서도 그의 시 정신은 변하지 않는 중심이 됐다. 그것은 시인이 '처음 만나던 때'처럼 지금 이곳에서도 정직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물어보아도 될까…/ 역사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고/ 주먹을 부르쥐고 외치는 사람이/ 누구 앞에서 눈물 한번 흘린 적 없이/ 씩씩하고 튼튼한 사람이 하필이면/ 왜 시를 쓰려고 하는지…'('조심스럽게'에서)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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