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는 낮았다. 조금의 바다는 쪽빛으로 잔잔했다. 인천 연안부두를 출항한 실버스타호는 4시간을 달려 봄철 꽃게잡이가 시작된 오후의 연평도로 들어섰다. 지난해 6월29일, 그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 경비정이 남한 해군 경비정을 향해 함포를 들이댔다. 남북 해군간의 3년만에 다시 벌어진 교전이었다. 많은 젊은 해군들이 죽거나 다쳤다. 쪽빛 바다에서 벌어진 두 번의 충돌은 모두 연평도 어민들의 봄철 꽃게조업이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 일어났다. 그리고 교전 책임 일부가 어민들에게 돌려졌다. 일부 언론이 일부 어민들의 말을 인용해 "우리 어선들이 허용된 어장을 넘어 불법조업, 북 경비정이 NLL(북방한계선)을 넘어온 빌미가 됐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또 다른 일부 언론이 "서해교전이 연평 어민 때문에 일어났다는 얘기냐? 조업구역은 이탈해도 NLL은 근처도 안갔다"며 역시 어민들의 말을 인용해 대거리했다. "꽃게는 꽃게대로 못 잡고, 욕은 욕대로 얻어먹었다"고 연평 어민들이 1년이 지나서도 하소연하는 소이연은 그러했다. 삽상한 봄바람 속 꽃게철이 시작된 인천 옹진군 연평면을 다시 찾은 이유이기도 했다.조업구역 감시 강화, 어민들 "못해먹겠다"
10일 새벽5시. 1㎞남짓한 연도교 위로 당섬 부두로 향하는 트럭 행렬이 이어졌다. 꽃게잡이를 위해 출항하는 선원들이었다. 선창을 정리하고 벼릿줄을 푸는 선원들의 분주한 손길 위로 숙취 가시지 않은 하품과 고함 소리가 날아다녔다. 30여척 꽃게잡이 배들이 해지면 들고, 해뜨면 나는 대연평도 당섬 부두, 희붐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분주한 것은 선원들만이 아니었다. 해양경찰서 연평출장소 직원에 해양수산부 직원까지 출항하는 배들을 마중하러 부두 한켠에 나와 섰다. 일장훈시가 떨어진다. "안전조업들 하시고, 조업구역 이탈은 꿈도 꾸지 마시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겉으론 "예, 예" 하지만 선원들은 뒤로 돌아선 이죽거리기 일쑤다. "못 해 먹겠네."
옹진군청 소속 어업지도선을 선두로 꽃게잡이 배들은 새벽 바다를 줄지어 가르기 시작했다. 어장 근처에 가면 인천시청 어업지도선과 해경, 해군 함정도 눈을 부라린 채 기다릴 터이다. 꽃게잡이가 시작되기 전 4월부터 관계 당국이 모인 '특별대책반'이 구성돼 아예 연평도에 똬리를 틀었다고 했다. 올해 들어 달라진 연평도의 새벽 출어 풍경이었다.
연평도 남쪽 바다엔 넓이 724㎢의 가상의 사다리꼴 모양의 '박스'가 존재한다. 특별히 대·소연평도 어민들만 조업할 수 있는 조업 구역이다. 연평 어민들이 꽃게를 잡아 먹고 사는 텃밭인 셈이다. 허가 받은 어선 55척만 그곳에 '틀'이라는 이름의 꽃게잡이 그물을 쳐놓고 봄 한 철, 가을 한 철 꽃게를 잡을 수 있다.
"땅도 갈다 보면 지력이 부치듯이 어장도 매 한가지"라고 했다. 점점 어획고가 줄었다. "구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싱싱한 꽃게들이 지천"이다 보니, 조금씩의 구역 이탈은 관례가 됐다. 혹 단속돼도 벌금보다 수확이 더 컸다. "선주들이 속도를 내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어선에 엔진을 두 개씩 달고 선체를 FRP(강화 플라스틱) 재질로 바꾼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국의 행정력은 어민의 생존력을 따라잡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6월 교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어민의 생존력에 급제동을 걸었다. "걸리면 조업 허가 취소를 각오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고, 조업 구역 자체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어민들은 엄포가 엄포가 아님을 실감한 듯했다. "올해는 박스에서 한발짝도 안나간다니까. 그러니 꽃게가 있겠어." 선원들은 하나같이 입을 비쭉 내밀었다.
이탈 폭로 어민들 '배신자' 낙인 찍혀 섬 떠나 연평도 어민회 회장 최율씨를 찾았다.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그의 목소리엔 날이 서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연평도서 나서 살면서 NLL 근처에 가보지를 못했는데 어디서 듣고 와서 NLL을 넘었대. 어민들끼리 더러워서 이젠 조업구역 철저하게 지키자고 했어." 또 다른 선주는 "뭐하러 왔느냐"고 노골적으로 기자를 타박했다. "우리가 무슨 38선을 넘었어? 우리보고 왜 그래." 한마디를 던지고 휙 돌아섰다.
계속 줄어드는 어획량에다 강화된 조업구역 단속으로 가슴마다 멍울이 섰을 터였다. 하루 조업을 마치고 저녁놀을 뒤로하고 당섬 부두로 돌아오는 선원들의 구리빛 얼굴 위로도 주름살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세끼 밥도 못 먹겠어. 수온이 낮아서 그런지 꽃게도 별로 없고…."
하지만 다른 목소리도 분명히 있었다. "교전의 원인이 됐든 아니든 어민들이 정해진 조업구역을 이탈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란 게 요지였다. "이를 계기로 어민들이 어장 관리를 근본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민 책임론'을 주장했던 신모씨는 "지킬 것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무슨 큰소리냐"며 "사람들이 자기 잘못은 생각도 않는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도 "어구를 마구 내다버리고 남획을 해대 결국엔 어장을 황폐화 시켜놓고는 이제 와서 꽃게가 잡히지 않는다고 구역만 자꾸 늘려 달라고 요구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생각 없이 조업하다가 제 무덤 자기가 판 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조업구역 이탈을 언론에 폭로했던 이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연평도를 떠나 있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떠나 '배신자'로 찍혀 있었다.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흉흉했다.
연평도 주민 생존의 전쟁 꽃게잡이
가오리 모양 연평도에서 주민들이 차고앉은 땅은 채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섬 북쪽을 중심으로 한 대부분 지역엔 해병 연평부대가 주둔해 있다. 558가구 1,300여명 주민들은 섬의 동쪽 한 켠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 섬 주위엔 풍광으로만 보면 여느 관광지 못잖은 절경이 수두룩하지만 해안가마다 삐죽삐죽 솟아오른 철책이며, 부릅뜬 초병의 눈빛 속 서늘한 긴장감이 공존한다. 서해 최접적(接敵) 지역. 북쪽 해안에 서면 북한땅 석도가 3.4㎞거리를 두고 손에 잡힐 듯하다.
하지만 주민들 사이에선 접적 지역의 긴장감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1·4후퇴 때 월남해 정착했다는 50대는 "서해 교전 당시에도 육지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전화질을 해댔다"며 "그런 겁을 내선 여기 못산다"고 했다. "전쟁 날까 봐 걱정하겠어. 꽃게가 안잡힐까 봐 걱정이지."
주민들의 근심과 긴장의 근원은 정작 다른데 있었다. 꽃게가 잡혀야 연평도에는 돈이 돈다. 비단 꽃게잡이 배 선주와 선원만이 아니라 연평도 전체를 꽃게가 먹여 살린다고 봐야 한다. "23년간 배를 탔지만 빚만 잔뜩 지고 동생에게 배를 떠넘기고 물러났다"는 60대 주민은 "섬 사람이 제일 불쌍하다"고 묻지도 않은 하소연을 잔뜩 늘어놓았다. "꽃게, 꽃게 해봐야 인천의 전주들만 돈 벌어주는 거야. 선주라고 해봐야 전부 빚더미 지고 앉았고, 선원들이야 오죽하면 외지서 이곳까지 배 타러 들어왔겠어. 나머지 사람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올해 꽃게가 시원찮으면 배 빼앗길 선주들 많을 텐데, 걱정이야."
오후의 갯벌. 등굽은 60대 노파 혼자서 해를 등지고 고둥을 따고 있었다. 거무죽죽한 속살로 드러난 뻘 위에서 노파는 굽은 허리를 연신 두들겼다. "용돈이라도 벌려고…." 주름살이 깊다.
"남편 일찍 사별하고 인천서 노동일 하는 아들 하나 있는데 벌이가 시원찮다"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젊은 사람들은 하나둘 연평을 떠난다고 했다. 동네엔 등굽은 할머니 혼자서 밥지어먹고 살아가는 집이 태반이라고 했다. 그래서 선수가 없어 마을 대항 체육대회도 해본 지 오래됐다고 했다.
"인천에다 아파트 하나 마련해 떠나는 게 이곳 사람들 대부분의 소망"이란다. "옛날 조기 파시 때만 해도 거창했고 꽃게도 한참 좋았는데…." 점점 희망 없는 섬이 되어 가는 게 걱정이라고도 했다.
앞바다서 두 차례의 피튀기는 남북 해군의 교전이 벌어졌던 서해의 고도, 그곳에 터잡은 1,300여명 주민들은 지금 지독한 생존의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연평도=이동훈기자 dhlee@hk.co.kr
사진 류효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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