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 기안·발안지역에서 각각 백제의 제철공방터와 대규모 취락 유적이 발견돼 화성 일대가 백제 왕국의 등장과 성장의 비밀을 풀어줄 보고(寶庫)임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화성은 10년 전만 해도 백제유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43번 국도를 따라 주거―생산―토성―매장공간 유적 등 한 묶음의 백제유적지가 잇달아 발굴되면서 초기 백제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급부상했다. 특히 최근 발굴된 기안 유적은 경기지역에서 발견된 첫 제철 관련 유적이고, 발안 유적은 미사리를 제외하고 가장 큰 백제 취락 유적이라는 점에서 관련 연구에 가속도가 붙게 됐다.발굴 의미
기전문화재연구원(원장 장경호)은 9일 화성 향남면 발안리와 태안읍 기안리에서 발굴 현장과 유물을 잇달아 공개하고 설명회를 가졌다. 기안리 풍성주택 아파트 및 학교 건설지에서 나온 제철관련 유적은 화로유적 10기, 도랑유적 12기, 숯가마 1기, 제련 때 사용된 송풍관과 철 찌꺼기 등이다. 이 유적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이 지역이 한성 백제 당시 중앙에 인접한 주요 지방세력의 거점으로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규모 제철공장이 형성된 것은 주변에 그만한 수요가 있고 또 그만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발굴단은 "당시 제철 기술수준으로 보아 지름 20㎝ 크기의 철 덩어리를 생산하려면 3톤의 숯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나무와 노동력이 필요했다"며 "이는 고대사회의 정치 권력과 생산력의 수준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말했다.
발안의 취락지 유적은 초기 백제시대 주변부의 발전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건물바닥을 파고 들어간 수혈식(竪穴式)으로 평면 형태를 기준으로 할 때 출입구가 튀어나온 철(凸)자형과 사각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55채의 주거지가 확인된 것은 이례적이다. 또 옹관묘 3기, 풍납동식무문토기와 타날문단경호(두드린 무늬가 있고 목이 짧은 항아리 모양토기)와 대형 독 등 수백개의 토기와 토기 파편이 나왔다. 발굴단은 "출토된 토기만으로도 원삼국시대에서 백제 초기에 이르는 편년 체계를 세울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논란과 과제
94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에서 발견된 대형 제철로는 4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시기적으로 3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기안 유적과의 연관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또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나온 낙랑토기가 과연 낙랑인들이 제작한 것인지 아니면 백제인들이 모방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일 것으로 보인다. 발안 취락유적의 경우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토층 별로 나오지 않고 교란된 상태에서 출토돼 형성과 지속 시기를 놓고 아전인수식 해석이 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취락이 400∼500년 동안 유지됐을 경우 주거지가 중복돼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다는 점도 의문이다.
그런데도 일단 전문가들은 긍정적 평가 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선복 서울대 교수는 "낙랑계통 토기에 대한 해석의 단초가 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제철유적이 존재한 시기와 장소가 함유한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면 초기 백제를 역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됐다"며 "이번 유적 형성 시기인 3,4세기 때의 고분만 확인되면 백제사 연구에 큰 획이 그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영 한신대교수도 "화성 일대의 유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4세기 중반 근초고왕이 영토를 확장할 당시 중앙과 지방의 관계, 중앙으로의 편입과정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성=글·사진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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